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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미인도’ 전시, 해괴함의 근원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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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천경자 작품 논란 ‘미인도’ 전시

작가명 없는 작품, ‘진품’ 거는 미술관 정체성 배치돼


한겨레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4전시실 안쪽 공간에 내걸린 <미인도>. 한쪽 벽에 벽감을 내고 홀로 전시된 이 그림 앞에 관람대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김민애 작가의 설치작품도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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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미술사에 전례를 찾기 힘든 해괴한 전시가 출현했다.”

미술판 사람들이 숙덕거린다. 19일부터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4전시실에서 소장품전 ‘균열’의 출품작으로 처음 선보인 <미인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미인도>는 고 천경자 화백(1924~2015)의 작품인지를 놓고 20여년간 공방을 빚어왔다.

1991년 언론보도로 <미인도> 위작 논란이 불거졌을 때 화랑과 미술관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진품이라고 했다. 작가는 자식 같은 그림을 못 알아보겠냐며 위작임을 절규하다 미국으로 떠나 2년 전 타계했다. 그렇게 거장에게 상처를 입히고 한국 사회를 소란스럽게 한 그림인데, 전시엔 작가 이름과 제목을 적은 표찰이 없다. 그 대신 석채안료가 빛나는 작품의 맞은편 벽에 <미인도>를 공개한 취지를 장황한 글로 풀어놓았다. 요약하면, “작품 공개는 진위 여부를 결정하거나 특정 결론을 유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술관은 관련된 주요 논쟁과 자료들을 중립적 시각에서 최대한 투명하게 공개해 담론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말미엔 물음도 던졌다. “작품에 관한 가장 정통성 있는 권위자는 작가인가. 미술관 등 공인된 기관인가. 전문가 혹은 감정기관인가. 혹은 대중의 믿음인가.”

이 문구를 읽고 나서 작품 옆 공간을 보면, 1980년 이 작품을 미술관이 인수하면서 비롯된 20여년 진위 논란에 얽힌 문서 자료들을 담은 아카이브 진열장이 있다. 그 뒤쪽 벽에 주요 논란 경과를 인쇄해 붙였고, <미인도> 정면 오른쪽 벽엔 ‘목에 칼을 대고 제 것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인터뷰 녹취록과 관련 방송영상 목록이 붙어 있다.

볼수록 알쏭달쏭하다. <미인도> 전시엔 작품에 대한 미술관 쪽 의견이 없다. 작가명을 뗀 전시형식은 근현대 미술관의 정체성과 어긋난다. 18세기 서구에서 근대미술관 역사가 시작된 이래 기관의 권위와 역량으로 진품 판정한 오리지널 작품을 표찰 붙여 전시하는 것은 철칙이다. 담당자인 장엽 연구관도 “지난해 12월 검찰 수사에서 진품 판정돼 이름을 넣어도 법적 문제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왜 뺐는가. 미술관 쪽은 18일 언론간담회에서 “위작 논란 자체를 조명하려는 것이며, 검찰 판정에 맞서 항고한 유족 상황도 감안한 것”이라는 사유를 댔다. 진품을 확신하지만,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관객이 객관적으로 판단해볼 기회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며, 유족이 반발할 수도 있으니 알아서 표찰을 뺐다는 말이었다.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은 “<미인도>가 감상의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는 당부도 했다.

이런 ‘배려’에도 유족들은 개막 직후 저작권법 위반 등으로 미술관 쪽을 추가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전시와 관련해 학계와 세미나 등의 학술적 논의를 할 계획도 잡힌 게 전혀 없다고 했다. 아카이브 진열장에 검찰 진작 판정의 결정적 근거가 된 전문가 안목감정 자료들이 아예 빠진 점도 눈에 걸렸다. 결국 대중들이 대충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인가. 미술판에서는 논란이 불거진 뒤로 지금까지 미술관 쪽이 작품을 숨겨놓기만 하고, 학계·평단이 참여하는 학문적 논의를 기피해온 관성이 이런 기묘한 전시를 빚은 근본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 뒷담화 거리로 비화됐는데 아직 전문적인 논문 한 편 나오지 않는 상황이 이를 방증한다. 생전 작가, 유족들과 꾸준히 소통하며 전문가 작품 공개와 학술적 토론을 이끌어낼 혜안을 지닌 이들이 미술관에 아무도 없었다. 미술관 사람들은 사법기관이 개입해 진품 판정을 내린 치욕을 겪은 뒤에야 작품을 공개하면서도 작가 이름 뺀 것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치부하는 모습이다. 두 달 전 <미인도> 전시 사실을 관장이 일부 언론에 먼저 알려 여론을 떠본 뒤 보도자료를 낸 행태도 그렇다. 무사안일했던 자기들 책임을 교묘히 물타기하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비판에 그들이 자신있게 반박할 수 있을까.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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