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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유전자 채취 대상 범죄 지나치게 많아…억울한 피해자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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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권모씨(31)는 지난 19일 대구지방검찰청 한 수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유전자(DNA) 감식 시료 채취 대상이니 검찰에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서면으로 출석 통보를 받았을 때 이미 채취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6개월이 지나고 다시 전화가 온 것이었다.

권씨는 지난해 2월8일 새벽 술에 취해 집 앞에 무단으로 차량을 주차한 이들을 아버지 권씨(68)와 함께 쫓아내려다 시비가 붙었다. 결국 서로 때리다 법정에 서게 됐고 부자는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그해 8월 아들과 아버지는 1심에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 징역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검찰은 “아들은 목검을, 아버지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와 타박상을 입혔다”며 특수상해죄로 기소했고, 법원은 이를 일부 인정했다. 권씨 부자는 억울했지만 “사업이 바쁘고 돈이 많이 들어서” 항소하지 않았다.

다음달인 지난해 9월 대구지검은 권씨 부자에게 안내문을 보냈다. 형이 확정됐으니 유전자 시료를 채취하러 검찰에 출석하라는 내용이었다. 권씨는 수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응하지 않겠다고 했고 수사관은 영장을 발부받아 채취하겠다고 나왔다.

아들 권씨가 음주운전으로 100만원의 벌금을 낸 것을 제외하면 부자에겐 전과도 없었다. 아버지 권씨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유전자 채취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는 취지의 진정을 넣었다. 아버지 권씨는 “집 앞에 들어온 이들을 쫓아내다 ‘범죄자’가 된 것도 억울한데 강력범죄 예방을 위한 유전자 시료 채취까지 당한다니 짐승이 된 것 같다.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대구지검은 지난해 11월 “특수상해죄를 범해 형이 확정된 사람에 대한 유전자 감식 시료 채취는 법에 근거한 것으로 정당한 직무 집행에 해당한다”는 답을 보냈다. 아들 권씨는 “유전자를 채취해 범죄 예방에 쓴다지만, 혹시 나중에 생길지도 모르는 자녀와 가족, 친척까지 연좌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고 주장했다.

권씨 부자와 같은 사람의 유전자까지 경찰·검찰이 수집해야 할까. 형이 확정된 이들의 유전자를 수집할 수 있는 ‘유전자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DNA법)이 시행된 이후 입법 취지와 다르게 유전자 수집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진다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 법은 아동을 성폭행해 장기를 파손한 이른바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2009년 12월29일 제정돼 이듬해인 2010년 7월 26일부터 시행됐다. 유전자 대조를 통해 흉악범죄의 범인을 신속하게 검거하고 재범을 막는 한편 죄가 없는 용의자는 수사 선상에서 조기 배제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해당 법에 따르면 경찰과 검찰이 모두 유전자 수집 권한을 가지고 있다. 구속된 피의자는 경찰 또는 검찰, 교도소에서 채취가 가능하고, 형을 살거나 구속되지 않았지만 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검찰에서 유전자를 수집한다.

문제는 유전자 채취 대상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점이다. DNA법 대상에는 살인, 방화, 아동 성폭행, 마약 등 강력범죄를 비롯해 폭력행위처벌에 관한 법률상 상해, 폭행, 주거침입, 재물손괴 등도 포함된다.

원칙적으로는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아 유전자를 채취해야 하지만, 채취 대상자가 동의하면 영장 없이도 할 수 있다. 이 점을 이용해 수사기관에서는 권씨 부자 사례와 같이 우선 유전자 수집을 통보하고 대상자가 응하지 않을 경우 영장을 청구하고 있다.

대상 폭이 넓다 보니 수사기관은 해당 죄목으로 형이 확정된 사람의 유전자를 모두 수집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을 뿐 유전자 채취 대상 선정, 안내문 발송이나 연락 횟수, 영장 청구 기준 및 집행에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

권씨 부자에게 시료 채집을 요구한 대구지검은 21일 “죄의 경중을 임의로 구분해 채취 대상자를 가려낼 수 없기 때문에, 특수상해죄와 같이 DNA법에 명시된 죄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유전자는 전부 채취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9월 문서를 발송했다가 반 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연락을 취한 데 대해서는 “휴대전화 번호를 몰라 통신사 등을 통해 조회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DNA법이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은 계속됐다. 지난 2월에는 노점상 단체 민주노점상전국연합 간부 최인기씨(51)가 유전자 시료 채취를 위해 검찰에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아 논란이 됐다. 최씨는 2013년 구로구 한 쇼핑몰이 노점을 철거한 데 항의해 쇼핑몰 안에서 집회를 하다 집단주거침입 혐의로 기소됐고, 지난 1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확정받았다.

유전자채취는 주거침입이나 재물손괴 혐의에도 적용돼, 노동쟁의나 집회·시위 등 시국사건 관련 수형자를 대상으로도 채취가 이뤄지고 있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검찰이 입법 목적을 무시하고 사회운동을 억압할 목적으로 유전자 채취를 악용한다고 비판해왔다.

앞서 헌재는 2014년 8월 유전자 채취 조항에 대해 재판관 5(합헌)대 4(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당시 헌재는 유전자 채취가 판사가 발부하는 영장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기본권 침해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시민단체들은 지난해 4월 “유전자 채취 영장은 불복 절차도 없어 헌법이 정한 영장주의 등에도 위배된다”며 다시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국회가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계속 나온다. 지난 18·19대 국회에서 노동쟁의나 집회·시위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선 유전자 채취를 제한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폐기됐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당초 특별한 강력 성범죄 예방에 대한 사회적 요구로 만들어진 법이지만 대상이 광범위해 국가의 감시망을 촘촘히하는 데 기여해 입법 취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며 “국회를 통해 법률 폐지를 포함해 DNA법안을 전면 재론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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