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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김진호의 세계읽기]우리가 알던 프랑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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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프랑스인들의 ‘저녁이 있는 삶’



미국인들은 조깅을 좋아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산책을 선호한다. 산책을 못한다면 프랑스인들의 ‘저녁이 있는 삶’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오후 5시가 조금 지난 시간, 파리 시내 어디에서건 일찍 퇴근한 직장인들이 저마다 갓구운 바게트를 들고 집을 향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프랑스 전국의 빵집에서 바게트는 정해진 시간에 2번 굽는다. 오전 5시와 오후 5시가 그 시간이다. 집에서건, 카페에서건 바게트를 곁들인 늦은 저녁을 먹고 한갓진 도시의 골목길을 걷는 것은 프랑스인들의 삶에서 결코 양보할 수없는 기본권이라고 할 수있다. 반 이민과 경제민족주의 색채가 진한 민족전선(FN) 대표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고 포퓰리즘이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대륙을 뒤덮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저녁 산책 풍경이다.

프랑스 특유의 톨레랑스(관용)가 갈수록 엷어지고 대혁명 이후 유지해온 공화주의 전통이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밀레니엄을 전후해 파리에서 2년 간 연수를 했던 기자는 프랑스 공화주의 덕을 톡톡하게 보았다. 외국유학생들도 월세의 3분의1을 빳빳한 현찰로 돌려주는 나라, 26세 이하 학생이라면 버스와 지하철, 국철 등 교통비의 대폭 할인은 물론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주던 나라. 임신기간 동안 매달 출산준비금을 나눠서 주는 것에서부터 스포츠센터나 영화티켓도 반값이었다. 특히 극장 안에서 팔던 팝콘까지 반값을 받는 것을 보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세밀한 부분에까지 미치는 데 감탄하지 않을 수없었다. 지금도 이러한 혜택은 상당 부분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상해졌다. 무슬림 이민자들을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FN의 마린 르펜 대표가 인기몰이를 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에 빗댄 ‘프랑스 퍼스트(La France d’abord)’란 짝퉁구호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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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이민 정서의 저변에 깔린 파괴당한 일상에 대한 분노



‘저녁이 있는 삶.’ 우리에겐 꿈이지만, 프랑스인들은 이미 누리던 삶이다.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 밤거리가 산책을 하기에 너무 위험해졌다면 그 누군가를 좋아할 수있을까. 산책 만 위험해진 게 아니다. 관광객들이 찾는 파리 시내 도심이야 철통 같은 경비로 안전하다지만, 교외(방리유)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사건, 사고가 발생한다. 파리 시의회는 2000만 유로(242억원)를 들여 에펠탑 주변에 방탄유리벽을 설치하기로 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화주의 전통, 사회정의는 모두 고상한 말이지만 정작 소박한 일상을 파괴당한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다. 누구라도 분노할 것이 분명하다. 처음엔 내놓고 증오를 표출하지 않겠지만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쌓이다 보면 좀 더 자주, 좀 더 강하게 분노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 분노를 누그러뜨리겠다는 믿음을 주는 정치인이 현실정치에서 승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의 경우 처음엔 니콜라 사르코지였고, 이제는 마린 르펜이 민심의 변화를 정확하게 포착한 것 같다.

‘저녁 산책이 있는 삶’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향수는 2007년 대선에서 다소 예외적인 정치인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유의 하나였다. 내무부장관 출신인 사르코지의 핵심 공약 중의 하나가 바로 치안 강화였다. 굵직한 테러는 물론 시민들의 일상을 파괴하는 치안불안 문제를 적극 대처하겠다는 그의 약속이 민심을 움직였다. 집권 5년 동안 각종 테러와 범죄에 대해 ‘무관용(Tolerance Zero)’으로 대처했다. 방리유 처럼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더 많은 경찰력을 투입한 것은 물론, 등교길 학교 앞에도 기동경찰을 배치해 학생들의 가방을 수색하게 했다. 하지만 사르코지의 근육질 치안정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적인 삶은 복원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애시당초 세계화에 이은 ‘포스트 세계화’의 시대에 접어든 상황에서 이민자 문제를 비롯한 구조적인 모순은 한명의 대통령 임기기간에 할 수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르코지의 몰락, 마린 르펜의 등극



지난해 대선 재도전을 선언했던 사르코지가 우파 공화당 내 경선에서 맥을 못추고 탈락한 것은 이미 그러한 치안대책 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입증했다. 이제 프랑스 유권자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이 르펜이다. 르펜은 다음달 대선 1차 투표를 앞두고 진행중인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 국민 3명 가운데 1명은 그를 지지한다. 2차 투표에서는 다른 정당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뒤진다. 하지만 대선 당락과 상관 없이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라는 르펜의 지위는 바뀌지 않는다. 정치 변방의 극우정당 대표가 주류정치권의 대표주자로 이미 등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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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현실이다, 세계가 프랑스 대선을 주목하는 이유



포퓰리즘이 도처에 횡행하고 있다. 지난 해 하반기 이후 두개의 ’설마‘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유럽연합(EU) 분담금을 두번째로 많이 내온 영국이 국민투표에서 탈퇴를 선택했고,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라는 이단아가 대권을 잡았다. 이제는 단순한 치안강화만으로 안된다. 사르코지의 추락이 이를 말해준다. 분노가 더 커졌거나,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더 커졌거나 아니면 두가지가 겹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르펜이 대표하는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기성 질서, 기성 제도에 도전하는 아웃사이더 집단들의 정치담론‘(마이클 카진 교수)인 포퓰리즘이 담론이 아닌, 현실에서 득세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2달이 넘으면서 세계가 매일 보고 있는 현실이다. 객관적인 사실 보다 감정호소가 더 효과적인 환경을 뜻하는 ‘탈진실(Post-truth)’이 지난해 옥스퍼드 사전에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다. 하지만 학문적 분석과 정치적 해석에 앞서 포퓰리즘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해야할 일은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선거의 향배를 가르기도 한다. 비난하고 통탄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를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포퓰리즘을 구현한 저변의 흐름, 즉 민심을 정확학 읽고 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대응 방안에 대한 고민이나 가치를 둘러싼 토론은 그 다음 수순에 할 일이다. 포퓰리즘의 향방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는 세계가 다음 달 23일 프랑스 대선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김진호 선임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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