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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조호연 칼럼]중국에 치이고 미국에 차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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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 한국을 린치핀(linchpin)에 비유했다. ‘핵심축’이란 뜻이다. 일본은 주춧돌이란 뜻의 코너스톤(cornerstone)으로 규정했다.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선 한국 위상이 달라진 모양이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이라면서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을 미·일 동맹을 뒷받침하는 하부 구조로 보는 것 같다.

경향신문

미국에 일본은 틸러슨의 말마따나 “경제 규모, 안보 관점”에서 한국보다 더 중요한 국가일 수 있다. 문제는 그의 인식보다 발언 시점과 방식에 있다. 한국에서 여러 차례 한·미동맹을 강조하던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서다. ‘차가 식기도 전에’ 다른 말을 한 셈이다. 게다가 한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에 대한 중국의 보복조치와 대통령 파면과 최고리더십 공백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한국의 어려운 처지를 나 몰라라 한 것이다. 외교에서 속내를 드러내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틸러슨이 작심하고 말했거나 무심했거나 둘 중 하나다. 문득 탄핵 반대 집회에서 성조기를 흔들던 친박과 보수층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일 것이다.

틸러슨은 서울에서 한·미 외교장관회담 후 만찬을 하지 않은 것은 한국이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한국 측은 이것이 대중에게 좋지 않게 보일 것이라는 점을 마지막 순간에 깨닫고 ‘내가 피곤해서 만찬을 하지 않았다’고 성명을 냈다”고도 했다. 추측까지 섞은 틸러슨의 도 넘은 언사는 한국은 안중에도 없다는 식이다.

틸러슨의 일탈적 언사는 한국 외교부가 체면을 구긴 것과는 별도로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불가성과 결합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트럼프 정권 들어 미국에서 한국 정부와 상의 한마디 없이 한반도 전면전을 유발할 수 있는 대북 선제타격론이 거침없이 나도는 현실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틸러슨의 ‘사드 갈등 처리법’도 맥락이 다르지 않다. 그는 한국에서 중국의 사드보복을 “대국답지 않은 부적절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행위”로 강력 비판했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중국의 입장 변화를 위해 미국이 노력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미·중 외교장관들은 회담 후 사드의 ‘사’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틸러슨이 그 문제를 거론이나 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세상이 한국을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 정도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방패 역할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사드 보복의 장기화 가능성을 의미한다. 사드는 동북아 이해당사국들에 일정부분 전략적 이익을 제공했다. 북한에는 핵개발 명분, 중국에는 소극적 대북제재의 동기, 미국에는 대중국 견제 수단이 되었다. 오직 한국만이 이익은 없고 혼란을 감수하고 있다. 사드로 중국에 치이고 미국에 차이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해결 방법은 국내에 있다.

박근혜 정부는 사드의 주한미군 배치 결정을 대화나 소통 없이 폭력적 방식으로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사드는 사상 검증의 기제가 되었다. 정부와 보수층은 사드 반대자를 불순세력, 종북세력, 매국노, 외부세력의 이름표를 달아 매도했다. 마치 신을 부인하면 살려주고 거부하면 죽이던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연상시킨다. 중국 외교총책임자를 만나 사드보복 자제를 요청한 야당의원들을 매국노로 몰아붙이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하급관리도 면담 못하는 정부의 무능은 은폐되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격이다.

박근혜는 물러났지만 사드 부조리극은 계속되고 있다. TV토론에서 대선 경선후보들은 사드 배치에 대해 오로지 찬성과 반대로만 말하도록 주문받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는 중시되지 않는다. 보수 일각에서는 중국의 오만한 자세를 비난하고 중국과 전쟁을 벌이자는 주장도 나온다. 북핵 막자는 사드 때문에 중국과 전쟁을 하자고 하니 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다.

사드의 근본적 문제는 왜라고 묻지 못하는 사회에 있다. 지금이라도 사드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 즉 사드가 다수 시민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허용해야 한다. 시민들 사이에 최소한의 공감대를 형성한 뒤 그 결과를 놓고 외부와 협상하는 절차를 밟는 게 올바른 순서다. 한국인 다수의 의사를 반영한 ‘주권적 조치’를 경시할 국가는 흔치 않을 터이다. 이것은 사드 문제로 갈가리 찢긴 여론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도 된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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