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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불·청·객' 때문에… 마장동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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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重苦 시달리는 축산물시장]

"고기 부위별 한자 메뉴판에 조선족 직원 채용했는데… 중국 관광객 채 10팀도 안와"

경기 불황 타개하기 위해 '값싼 세트' 내놔도 잘 안팔려

상인들 "가장 우울한 명절"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법)이 문제가 아녜요. 한한령(限韓令·중국의 한류 금지령)이 더 무서워요."

설 연휴를 일주일 앞둔 20일 오후 서울 성동구 마장동 축산물 시장. 도소매 점포와 정육식당 등 3000여곳이 밀집한 국내 최대 축산물 시장인 이곳은 오가는 손님 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한산했다. 쇠고기 도소매점인 한미축산유통 조선희(46) 대표는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하던 중국 관광객들이 요즘 들어 절반 이하로 줄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가게는 3년 전 홍콩의 유명 연예인이 한우를 사는 모습이 중국에 방송되면서 '싸고 맛있는 집'으로 입소문을 탄 곳이다. 그런데 작년 말부터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한·중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중국 손님들 발길이 끊겼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성동구 마장동 축산물 시장의 한산한 모습.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곳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뤘지만, 최근엔 중국의‘한류 금지령’으로 관광객이 준 데다 경기 불황과 김영란법 시행으로 손님들 발길이 뜸해졌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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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축산물 유통의 60~70%를 담당하는 마장동 축산물 시장은 요즘 50여년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경기 불황과 김영란법 시행으로 설 수요가 크게 줄어든 가운데, 중국인 관광객들마저 급감하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마장 축산물 시장 상점가 진흥사업 협동조합 이춘근 상무는 "한 해 전체 시장 매출이 1조원 정도였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로 매출 30%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나마 상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2년 전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중국 관광객들 덕분이었다. 상인회에 따르면, 2015년 중국과 홍콩 언론에 이 시장이 '아시아 최대 고기 천국'으로 소개된 뒤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시장 북문 쪽에서 육우를 판매하는 대광식품 유기수 대표는 "동대문에서 쇼핑을 한 중국 관광객들이 여기에 들러 식사도 하고 중국에 가져갈 고기도 사갔다"고 말했다.

정육식당 '고기랑카페랑'은 하루 20명 이상의 중국 관광객이 한우를 먹고 갔다고 한다. 가이드를 따라온 단체 관광객들보다는 인터넷이나 SNS 등을 보고 직접 찾아온 가족·커플 단위 여행객들이 주를 이뤘다. 수일식품 대표 김영신(56)씨는 "중국인 관광객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건 아니지만, 살치살이나 최고 등급인 1++ 고기를 사가기 때문에 매출의 70%를 벌어다 줬다"고 말했다. 중국 손님을 맞기 위해 상점들은 고기 부위를 한자(漢字)로 적은 메뉴판을 설치하고,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조선족 직원을 채용했다.

그런데 최근 중국 관광객이 줄어 시장에 비상이 걸렸다. 20일 낮에 이 시장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은 채 10팀이 되지 않았다. 한국 여행 첫날부터 마장동 시장을 찾았다는 홍콩인 애비 폭(44)씨는 "'HK DISCUSS'라는 사이트를 통해 마장동 시장을 알게 됐는데 먼저 다녀온 친구들이 맛 좋고 가격도 싸다고 추천을 해서 오게 됐다"며 "홍콩인들은 사드를 크게 의식하지 않지만, 중국인들은 굉장히 신경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누야 홍성애(54) 대표는 "하루에 적어도 중국인 관광객 두세 팀은 고기를 무더기로 사갔는데 요즘은 통 오질 않는다"며 "10만원짜리 한우 부위별 중국어 메뉴판을 주문하려다 그만뒀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불황 타개를 위해 값이 5만원 이하인 '김영란법 세트'를 내놨지만, 판매는 신통치 않다고 한다. 한우를 유통하는 박연미(46)씨는 "비싼 한우 대신 미국산 갈비로 4만5000원짜리 선물세트를 만들었는데 잘 팔리지 않는다"며 "김영란법 시행 이후 쇠고기를 먹는 문화 자체가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충북상회제인을 운영하는 조성준(58)씨는 "넘어진 몸을 일으키려는데 누군가 또다시 짓밟고 지나간 느낌"이라며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생애 가장 우울한 명절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주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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