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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68년 전 오늘…건국 후 첫 '올림픽 메달' 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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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역도 김성집, 런던올림픽서 동메달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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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런던올림픽 역도 경기에 출전해 건국 후 첫 올림픽 메달을 딴 김성집 선수./사진=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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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출발해 부산-요코하마-상하이-홍콩-캘커타-카이로-로마-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까지.

1948년 대한민국 올림픽 선수단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한 경로다. 이들은 올림픽 후원권으로 마련된 적은 비용으로 올림픽을 치러야 했다. 20일 동안 기차와 배, 비행기를 갈아타며 런던으로 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메달을 따기는커녕 경기를 제대로 치르기도 어려울 것 같은 여정. 그러나 68년 전 오늘(1948년 8월11일) 30세의 역사(力士) 김성집은 태극기를 달고 '건국 후 첫 올림픽 메달'을 들어올렸다. 배와 비행기 안에서도 역기를 놓지 않았던 집념으로 이룬 쾌거였다.

김성집은 역도 미들급에서 추상(현재는 폐지) 122.5㎏으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에 인상 112.5㎏, 용상 145㎏을 더해 합계 380㎏으로 미국의 프랭크 스펠만과 피터 조지에 이어 동메달을 획득했다.

대한민국의 올림픽 첫 메달은 그의 12년 묵은 한을 푸는 메달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절 압도적인 실력을 갖췄지만 일본의 방해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성집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나갈 선수를 뽑는 조선 예선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도쿄로 건너가 일본 선수들과 치른 대회에서도 317.5㎏로 1위를 차지했지만 조선 선수를 대표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던 일본은 역도 종목 출전을 포기했다.

이후 1940년과 1944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올림픽이 열리지 않았다.

김성집은 대회에 나갈 기회가 없었지만 역도를 놓지 않았다.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조선생명보험, 석탄회사 등에서 일하면서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후 해방이 되고 나서야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는데 당시 그는 모교인 휘문고등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성집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따냈다. 운동선수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였다. 그는 한국인 최초 올림픽 2회 연속 메달리스트가 됐다.

1956년 38세가 된 김성집은 멜버른 올림픽에서 5위를 기록하고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이후 스포츠 행정가의 길을 걸으며 남은 인생을 보냈다. 대한체육회 이사, 사무총장, 태릉선수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고문 등의 역할을 맡으며 한국 체육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2011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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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선수에서 스포츠 행정가까지 '영원한 올림피언'이었던 故 김성집 선수는 지난 2월2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사진=뉴시스


역도선수로 시작해 스포츠 행정가까지 ‘영원한 올림피언’이었던 김성집은 지난 2월2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김성집 선생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던 장미란의 다짐이었다. 2016 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에서도 김성집의 후배들은 '한국 역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섰고 지난 8일 여자 53㎏급에서 윤진희가 동메달을 따냈다. 오는 13일에는 남자 85㎏급에 유동주, 14일에는 남자 94kg급 박한웅, 15일에는 여자 +75kg급에 손영희와 이희솔이 메달에 도전한다.

이슈팀 박지윤 기자 satinbow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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