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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추억 속 황새, 다시 사람 속을 노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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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황새공원’ 백월산 자락의 작은 마을 예산군 대리

충남 예산군 광시면 대리(大里)는 417m 높이의 백월산 아랫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전체 56가구 가운데 20여 가구가 파평 윤씨 후손인 집성촌이다. 예산군과 청양군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어 거리상으로는 예산군 중심가보다 인근 청양군이나 홍성군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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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가운데에는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서 있다. 농한기인 겨울에는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시시콜콜한 마을의 일상사를 교환하거나 화투놀이로 시간을 죽인다. 지난 가을 수확철에 황금빛으로 출렁였을 논도 이즈음엔 앙상한 바닥을 드러낸 채 적요하다. 여느 시골마을과 비교해 특별할 게 없는 풍경이다. 이곳에 국내 유일의 황새공원이 있다는 점만 빼면 그렇다.

겉보기에 평범한 이 마을에서는 2009년 이후 황새와 인간이 공생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3일 오후 2시, 황새 두 마리가 날개를 펼친 채 공원 위 상공을 선회했다. 황새공원에서 적응 훈련을 거친 후 지난해 9월 자연방사돼 야생 상태에서 사는 황새들이다. 흰색 깃털로 덮인 몸통 탓에 길쭉한 검은 부리와 쭉 뻗은 다리가 더욱 도드라졌다. 한 마리는 오픈장(위가 뚫려있는 사육장) 안으로 곧장 착지했지만, 다른 한 마리는 5분 가까이 주변을 배회한 끝에 비로소 내려앉았다. 황새들은 사육사 현준희씨가 전갱이를 잔뜩 담은 양동이를 들고 오픈장 안으로 들어가자 적응 훈련 중인 다른 황새 14마리들 사이에 뒤섞여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마을 주민 윤광기씨(50)의 집에서는 자연방사된 후 마을 인근에서 살고 있는 황새들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그는 황새가 비행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한다고 말했다. “비행할 때 모습이 아주 예뻐. 날개를 이렇게 스윽 펼치면 소리도 나고. 작은 새들은 아무리 날갯짓을 해봐야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잖아. 이건 계속 소리가 들려. 바람을 타고 빙빙 돌다가 쭈욱 올라가는데, 기가 막혀. 한눈팔면 금방 놓쳐버려.” 황새가 비행하는 모습을 설명할 때 그는 마치 자신이 황새가 된 듯 고개를 앞으로 빼고 연신 두 팔을 휘저었다. 그는 마을의 황새춤 동아리에서 활동한다. 마을 행사나 예산군 지역 축제가 벌어지면 황새탈을 쓰고 황새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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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오후 2시쯤 충남 예산군 대리 황새공원에서 황새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서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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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도 어린 시절에는 황새를 본 적이 없다. 그가 황새를 처음 본 것은 2009년 예산군이 문화재청 공모에서 ‘황새마을 조성 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이후의 일이다. 전통적으로 길조로 여겨졌던 황새는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텃새였지만, 1970년대에 사실상 멸종됐다. 1971년 충북 음성군 생극면에서 마지막 황새 한 쌍이 발견됐으나 그해 4월 수컷이 사냥꾼의 총에 맞았다. 암컷은 농약에 중독된 후 1994년에 죽었다.

지난해 6월 정식으로 개원한 황새공원은 1996년 7월 한국교원대 황새생태연구원 박시룡 원장이 러시아에서 황새 20여마리를 들여와 황새복원사업을 시작한 지 약 20년 만에 거둔 성과다. 황새생태연구원은 2002년에 첫 인공번식에 성공했고, 2008년에는 대리모를 통한 번식에 성공했다. 남은 것은 황새들이 야생상태에서 살 수 있도록 마을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황새의 야생 적응과 자연방사 후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서식지 부근에 농약을 쓰지 않는 친환경농업 마을이 있어야 한다. 미꾸라지, 붕어, 우렁이, 메뚜기 등 다양한 논생물이 황새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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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9일 개원 첫날 황새공원을 찾은 관람객들이 공원을 둘러보고 있다. 황새공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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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은 2009년 6월에 ‘황새마을 조성 사업’ 대상지로 뽑혔다. 애초 대상지로 유망했던 지역은 충북 진천군과 음성군 등 오래전 황새 서식지였던 곳들이다. 그러나 주민동의를 구하지 못해 최종적으로 예산군이 선정됐다. 190억원을 투입해 13만5669㎡ 부지에 조성된 황새공원은 오픈장, 전시관과 영상실, 체험학습실, 생태습지와 전망쉼터, 소나무공원, 부화실, 사회화훈련장, 야생화훈련장, 번식장, 계류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지난해 6월 정식으로 개원했다. 같은해 9월에는 국내 최초로 황새 8마리를 자연방사하는 데 성공했다. 2월3일 현재 세 마리는 대리 인근에 있다. 또 충남 아산시, 태안군, 홍성군, 전남 진도군에 각기 한 마리가 있다.

‘산황이’라는 이름의 나머지 한 마리는 지난해 일본 가고시마현 오키노에라부 섬 공항 인근에서 사고를 당해 죽었다. 먼 거리를 비행해 기력을 잃은 산황이가 이착륙하는 비행기 기류에 휘말렸고, 이어 활주로를 들이받아 사망했다는 것이 일본 측의 공식 설명이다. 주민들은 “그 어린 것이 어쩌다 거기까지 가서 죽었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마을 이장인 윤병묵씨(63)는 “심지어 일본에서 총을 쏴서 죽였다고 생각하는 주민들도 있다”고 전했다.

황새의 이해관계와 마을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황새마을이 된 뒤 마을이 발전했느냐에 대해서는 주민들의 의견이 조금씩 엇갈린다. 농약을 쓰는 관행농에서 친환경농으로 전환하게 되면 농식품부의 인증관리를 받아야 하는 불편함이 따른다. 초창기에는 “농사꾼이 농약을 안 쓰고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는 불만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적응한 상태다. 황새공원을 찾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마을 곳곳을 손봐 마을 외관은 이전보다 깔끔해졌다. 불만은 공원 조성을 위해 농지가 수용된 이후에 나왔다. 윤병묵 이장은 “물론 보상을 받긴 했지만 땅이 수용된 농가들이 다 소규모 농가들이어서 농지를 내주고 나서 할 일이 없어졌다. 땅 판 돈을 자식들한테 주고 빈털터리가 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황새공원이 들어서고 황새마을이 되면 잘 산다고 해서 동의를 해줬는데 지금은 애초 약속했던 친환경농산물 판매장도 설치해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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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황새생태농업연합회 대표를 맡고 있는 윤봉균씨(50)는 “40㎏ 쌀 한 가마니의 정부 수매가가 5만3000원인데, 친환경쌀은 7만3000원에 전량 아이쿱에 판매하고 있어 소득은 꽤 올랐다”고 말했다. 반면, 2013년과 2014년 두 차례 사육사 교육을 받고 황새공원에서 일하는 주민 윤병호씨(49)는 “체감상으로는 소득이 많이 오른 것 같지 않다”며 “외부인들이 많이 들어오다 보니 동네 인심이 좀 나빠졌다”고 말했다.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공원 해설사로 일하는 주민 박상진씨(51)는 “농사를 많이 짓는 분들은 혜택이 많지만 소농가는 이익이 적다. 고령화로 농사를 못 짓는 분들은 사람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값은 더 받더라도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며 “주민들 입장에선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마을의 고령화도 걸림돌이다. 대리 마을 주민 100여명 중 50대는 6명에 불과하다. 주민 대부분이 70대다. 중장기적으로는 아이쿱 이외에 안정적인 판로를 두세군데 더 확보하고 초기 단계인 농촌체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확대해 마을을 명실상부한 생태관광지로 만드는 것이 과제다.

황새생태연구원은 향후 10년 동안 한반도를 전북·전남권역, 경북·경남권역, 황해도·DMZ권역 등 3개 권역으로 나눠 권역별로 모두 60마리를 방사할 계획이다. 올해는 예산군 황새마을 외에 제2의 번식지를 물색할 예정이다.

서동진 황새공원 선임연구원은 “대리에서는 친환경 벼농사라는 1단계 과제만 마친 상태”라며 “축산도 친환경 방식으로 하는 ‘경축순환’(가축 분뇨를 이용해 퇴비·액비를 생산하는 방식)까지 가야 한다. 한반도 황새복원 사업이 성공하려면 마을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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