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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삶의 빛을 찾아 ‘희망의 끈’ 꼭 쥐고 달리고 또 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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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이주상씨, 동반주자 김남현 소방관과 ‘시드니 마라톤’ 완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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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블랙모어스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시각장애인 이주상 씨(왼쪽)와 동반주자로 나선 소방관 김남현 씨가 결승선을 통과한 뒤 환호하고 있다. 시드니=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신은 제 시력을 모두 가져갔지만, 그 대신 소중한 친구를 보내줬습니다.”

21일 오전 호주 시드니에서 ‘2014 블랙모어스 국제마라톤대회’가 열렸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 약 3만3000명이 참가하는 이 대회에는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에쓰오일이 선발한 ‘감동의 선수단’ 소속 장애인 선수 14명과 동반주자 3명도 함께했다.

42.195km 풀코스에 참가한 시각장애인 이주상 씨(49·시각장애 1급)는 이날 4시간 10분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선천적으로 진행성 망막색소변성증을 앓아온 이 씨는 어려서부터 점점 시력이 나빠지다가 2002년에 시각을 완전히 잃었다. 이 씨는 “앞이 잘 안 보이다 보니 외부 활동을 멀리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게 됐다”며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근육이 약화되고 건강이 나빠졌다”고 말했다. 이 씨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취미로 마라톤을 시작했다가 꿈을 키워 대회까지 참가했다.

이 씨를 위해 동반주자로 뛴 김남현 씨(43)는 서울 송파소방서에서 근무하는 현직 소방관. 김 씨는 “재난현장에 출동해서 장애인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어려운 처지와 아픈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며 “장애인의 아픔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중 동반주자를 구한다는 김 씨의 사연을 듣고 자원했다”고 말했다. 10년 전 직장 선배의 권유로 마라톤을 시작한 김 씨의 지금까지 최고 기록은 2시간 35분 22초로 아마추어 대회에서는 우승권에 들 정도다. 김 씨는 “소방관으로서 남을 돕는 것이 내 본분이지만, 이렇게 마라톤을 통해서도 장애인을 도울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날 완주에 성공했지만 중간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결승점을 약 7km 앞두고 이 씨가 도로 턱에 걸려 넘어진 것. 눈이 잘 보이는 보통 사람 같았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시각장애인인 이 씨에게는 큰 장애였다. 김 씨의 도움으로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온 이 씨는 “순간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친구(김 씨)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고 말했다. 이날 두 사람이 세운 기록은 이전까지 이 씨가 세웠던 최고기록을 약 50분이나 앞당긴 것이었다.

한국 선수단 중 최연소 주자로 9km 코스를 완주한 박새진 양(14·지적장애 2급)은 “장애 때문에 사람 만나기가 무서웠는데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며 마라톤이 삶을 바꿨다고 말했다. 장애인 국가대표 마라토너를 꿈꾸는 정미진 양(19·지적장애 1급)은 9km 경기를 마친 뒤 “코스는 어렵지 않았지만 참가자들이 워낙 많아 앞으로 치고 나가기가 어려웠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풀코스에 참가한 전병혁 씨(23·자폐 2급)는 “지금까지 마라톤을 하며 달린 것 중 제일 기록이 좋은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감동의 마라톤 선수단’을 이끈 송대경 단장은 “선수단 중 누군가는 이 대회가 생애 마지막 해외 마라톤일 수도 있다”며 “장애인도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장애인스포츠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이효상 사회복지사는 “마라톤을 통해 장애인들이 꿈을 찾고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 감동의 마라톤의 목적”이라며 “장애인은 할 수 없다는 일반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소망을 전했다.

시드니=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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