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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한 큐1만점 ‘당구전설’ 남도열 “다섯바퀴 도니 끝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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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 큐"에 1,000번의 득점으로 10,000점을 낸 기록의 주인공은 남도열(66) 원로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당구계 전설이다. 주력은 4구였지만 3쿠션, 예술구에서도 일가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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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빌리어드뉴스 이우석 기자] “7000점!... 8000점!”

1994년 11월 전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2회 전북도지사배 전국당구대회’ 4구 결승전. 선공에서 30점(4구식 점수로는 300점)을 친 상대가 대기석으로 들어가자,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몇 번 툭툭 치더니, 어느새 빨간공 두 개를 쿠션에 붙였다. 그리고 경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세리’(4구 경기에서 빨간 공 두 개를 붙여놓고, 쿠션을 따라가며 득점하는 방법)기술을 선보이며 테이블을 다섯 바퀴 돌며 1만점을 쳤다. 그것도 한 큐에.

당시 대회 4구 경기는 단판으로 정해진 점수를 먼저 득점하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예선 3,000점, 준결승은 5,000점, 결승은 1만점이었다. 그가 1시간 40분 남짓 신기의 세리쇼를 선보이며, 마지막 1,000번째(10,000점)득점에 성공하자 500여명의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날의 주인공은 남도열(66) 원로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당구계 전설이다. 주력은 4구였지만 3쿠션과 예술구에서도 뛰어났다. 2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당시 ‘1만점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1996년 ‘전북도지사배 전국당구대회’를 끝으로 4구종목은 전국대회에서 사라지고 3쿠션 바람이 불었다. 체계적으로 3쿠션을 배운 적이 없었던 남도열 원로는 자연스레 입상권과 거리가 멀어졌고, 이후에는 한발 물러나 한국 당구발전에 힘을 쏟았다.

대한당구연맹 자문위원, 대한당구원로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를 그가 운영하는 경기도 포천시 송우리 황실당구클럽에서 만났다.

▲‘한 큐 1만점’을, 그것도 결승전에서 쳤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

= 1994년 11월 전주대회에서였다. 정확히 한 달 전 열린 제주도지사배에서도 우승해 자신감은 있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겨울이라 체육관도 굉장히 추웠다. 당연히 공과 테이블 상태도 좋지 않았다.

▲언제부터 ‘한 큐 1만점’을 의식했나.

= 1만점을 한 큐에 다 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경기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5,000점을 넘어가더라. 그때부터 살짝 의식이 되더라. 관중들도 “7000점!, 8000점!”하며 천 점 단위로 점수를 외쳐주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때부터 더 집중했다. 다 끝나고 보니 1시간 40여분 걸렸다.

▲1시간 40분을 계속 쳤는데,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나.

= 당시 마흔 두 살이었는데, 한창때 아닌가. 경기 중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테이블을 다섯 바퀴 돌았다는 얘길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크게 힘들었던 기억은 없다. 경기에 몰입하게 되면 힘들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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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열 원로의 94년 전북도지사배 대회 "한 큐 1만점" 우승은 큰 화제가 됐다. 사진은 "당구사상 첫 대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지면 신문에 소개된 남도열 원로의 당시 우승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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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록으로 우승했는데, 우승 상금은 얼마였나.

= 지금에서야 이야기하지만 당시엔 보상을 해줄 수 있는 기구도, 제도도 없었다. 우승 기념으로 트로피 하나 달랑 받았다. 당시는 그게 당연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대신 주변 당구인들에게 정말 많은 축하를 받았다. 앞서 언급했듯 최악의 환경에서 시합을 했으니까. 다들 “대단하다”며 칭찬해주더라.

▲‘한 큐 1만점’기록은 한 번 뿐인가.

= 94년 전주대회가 유일하다. 그 한 달 전인 제주도지사배 대회에선 개회식 때문에 결승전 경기를 잠시 중단하고 다시 쳤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다섯 큐에 1만점을 쳐 경기를 끝냈다. 96년 전북도지사배 결승전때는 세 큐에 1만점을 쳤다.

▲활동하던 80년대 중반~90년대 초에는 당구대회도 많지 않았을텐데.

= 그땐 공식적인 대회가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또 3쿠션보다 4구가 중심이던 때였고, 대회에서 우승해도 경제적인 수입이 전혀 없었다. 34살이던 1986년도에 최근과 같이 당구 프로화에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다. ‘프로당구 선발전’이 열렸는데, 4구와 3쿠션, 예술구에 각 10명씩 선발 예정이었다. 나는 3종목 모두 입상해 선발됐다. 그 정도로 기량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였다. 당시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생겨나면서 당구도 ‘프로당구위원회’가 발족이 됐다. 프로가 되면 사회적으로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겠구나 싶어 개인적으로 너무 기뻤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엔 프로화를 출범할 대회나, 상금규모, 후원사 등 어떤 것도 준비가 안돼 있었다. 결국엔 없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최근에 ‘당구 프로화’가 논의 중인데.

= 프로화 얘기가 나오는건 당시와 지금이 비슷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가 있다. 현재는 구체적인 준비가 되어있지 않나. 선수층도 탄탄하고 프로를 현실화할 수 있는 제반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프로가 생기면 굉장히 뿌듯할 것 같다. 한번 실망했던 경험자로서 당구계가 철저한 준비를 갖추어 빨리 프로당구가 출범했으면 한다.

▲TV에 처음 당구가 나왔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 80년대 중반 쯤으로 기억한다. 저녁시간에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해주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느날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되는 바람에 프로당구 하이라이트가 방영된 적이 있었다. 부산의 김평준 선수와 내가 시합한 프로당구 선발전 경기가 녹화중계됐다. 프로그램 방영 목적으로 찍은 건 아니었다. “당구도 TV에 나오는 시대가 됐다”며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벅찼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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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기념으로 트로피 하나 달랑 받았지만, 그땐 그저 좋았지. 허허" 2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당시 ‘1만점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당시 받았던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남도열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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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당구가 환영받지 못했던 분위기였을텐데.

= 직업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당구선수라고 답하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시기였다. 당시 당구 선수들은 수입이 전혀 없었으니까. 지금처럼 후원도 없었고, 대회에서 입상해도 상금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다. 하루빨리 내가 당구선수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최근 세계무대를 호령하는 후배들이 자랑스러울 것 같다.

= 굉장히 뿌듯하다. 이제 캐롬 종목은 우리나라가 중심국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세계랭킹 10위권 내 가장 많은 선수(3명)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 후배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부럽기도 하다. 하하. 다만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조언하고 싶은 점은 ‘직업의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거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당구를 직업으로 삼은 만큼 최선을 다해 연습해야 할 것이다. 아무도 가지 못한 길을 가려면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한다. 직업의식을 가지고 선수생활에 임하다 보면 부와 명예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될 것이라 본다. 꿈을 이룰 수 있는 여건도 과거에 비해 굉장히 좋아지지 않았나.

▲조명우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던데.

= (조)명우(수원연맹)가 초등학생때 방학을 이용해 우리 집에서 생활하며 당구를 배웠다. 당시 하윤보 경기당구연맹 회장 소개로 명우를 알게 됐다. 큐를 짧게 만들어주면서 당구를 가르쳤다. 어린 꼬마였지만 당구에 대한 열의는 어른 선수들 못지 않았다. 어른들과 경기해서 지면 우는 등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지금 한국당구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성장한 걸 보니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지역(포천) 대회 개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내가 당구 선수로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에 대회 하나라도 더 개최한다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다. 국내에서 경기도가 가장 활발히 당구대회를 개최하고 있지만, 사실 포천은 변방이다. 포천을 알리기 위해선 전국대회 유치가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포천시체육회 관계자들과 이현우 포천당구연맹 회장 등 여러 사람들과 수차례 미팅을 했다. 결국 대한당구연맹승인을 받고 예산을 받아 지난 3월 포천대회(제14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전국동호인당구대회 및 2018 대한당구연맹 전국선수권대회)를 개최하게 됐다. 지난해에는 경기도당구연맹 주관 여자 3쿠션 당구대회를 개최했다. 규모가 크지 않아 충분히 지금 운영중인 당구장에서 대회를 치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대회 규모를 떠나 언제든 개최하고 싶다.

▲당구발전을 위해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 당구가 지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정식 종목에서 빠졌다. 아시아 여러 각국과 공조해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다시 채택될 수 있도록 국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그것을 보고 성장하는 어린 선수들이 당구계에 수혈이 되고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당구만 잘쳐도 먹고사는 세상이 됐다는 걸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 나아가 IOC(올림픽위원회)에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올림픽 무대에서 당구 테이블에 태극기가 휘날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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