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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진숙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19) 체코 화가 알폰스 무하와 민족주의…슬라브 풍 도안으로 ‘무하스타일’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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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은 화젯거리였다. ‘아르누보’ 미술의 거장 알폰스 무하(Alfonse Mucha, 1860~1939년)가 담당해 세련된 취향을 유감없이 보여준 덕분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제국령에 편입했고, 체코 출신의 무하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의 작가 자격으로 이 일을 담당하게 된 것. 개인적으로는 큰 영광이었으나 무하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했다. 무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위해서 일을 했던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을 거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무하는 데뷔 5년 만에 당시 문화, 경제,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고 자주 모방되는 미술가 중의 한 명이 됐다.

매경이코노미

그림 ➊ 알폰스 무하, 연극 ‘지스몽다’를 위한 포스터, 1895년.


그의 데뷔는 하나의 전설이었다. 1895년 1월 1일 새해 첫 아침 눈을 뜨니 그는 유명인이 됐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버린 제작자를 대신해 무하가 만든 사라 베르나르 주연의 연극 ‘지스몽다’ 포스터(그림 ➊)가 온 파리 시내를 뒤덮었던 것. ‘신성한 사라’라고 추앙받던 국민 여배우에게 전격 발탁되면서 무명의 무하는 스타덤에 올랐다. 그 후 무하는 극장 공연 포스터 외에 다양한 상품 광고 디자인, 보석 디자인, 순수 회화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활동을 이어갔다. 무엇이든지 그의 손을 거치면 아름다운 ‘무하스타일’로 태어났다. 세련된 무하스타일 여인들의 매혹에 파리가 녹아들었다.

‘지스몽다’ 포스터와 ‘백일몽’에서 보이는 것처럼 슬라브 민족의 정신적 고향인 정교회 성인들의 후광을 연상시키는 원형 배경, 비잔틴 풍의 모자이크 패턴, 레이스와 자수 장식의 슬라브 풍 의상, 신비주의적인 표정 등은 무하스타일의 핵심 요소였다. 슬라브 풍의 무하스타일이 사랑받았던 것은 당시 프랑스의 친슬라브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1871년 통일 후 급성장하고 있던 독일을 견제하면서 프랑스와 슬라브 국가인 러시아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체코인이라는 정체성, 범슬라브 철학’은 무하의 삶과 예술 창작의 굳건한 지주였다.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합병된 것은 17세기였지만, 그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하의 어린 시절이었던 1860~1870년대는 체코 민족부흥 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고 무하는 평생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살았다. 그런 그에게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지배령의 화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봉사해야 했던 일은 큰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바쳤던 드보르작이나 스메타나처럼 이후 무하는 자신의 성공과 재능을 좀 더 크게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가 ‘슬라브 서사시’(1911~1928년) 연작이다. 미국 사업가 찰스 크레인이 후원을 약속함으로써 무하는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친슬라브파인 크레인은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 대통령이 될 토마시 마사리크(1850~1937년)의 친구였으며,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돼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우드로 윌슨(1856~1924년)의 친구이기도 했다. 1910년 무하는 고향 체코로 돌아와 1000년이 넘는 슬라브족의 역사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슬라브 민족 국가인 세르비아의 갈등에서 1914년 1차 대전이 시작됐다.

1918년 1차 대전이 종결되면서 마침내 신생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가 탄생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아래 있던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들이 신생 국가로 독립했다. 그러나 승전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영토 확정은 다시 2차 대전의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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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➋ 알폰스 무하 디자인의 체코 화폐.


새롭게 태어난 조국을 위해 무하는 자신의 재능을 아끼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위해 국장, 우표, 지폐를 무상으로 제작했다. 덕분에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의 지갑에는 전대미문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돈이 들어 있었다(그림 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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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➌ 알폰스 무하, ‘슬라브 찬가 : 인류를 위한 슬라브인들’, 1926년.


1919년 먼저 완성된 ‘슬라브 서사시’ 11점의 작품이 공개됐다. 프라하에 이어 미국으로 이어진 순회전시를 통해 무하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된 문화를 가진 유서 깊은 민족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다. 1928년 작품들이 최종 완성되자, 무하는 이를 기증해 공공의 것이 되도록 했다.

연작의 대단원에 해당하는 ‘슬라브 찬가(그림 ➌)’는 슬라브 민족의 지난한 역사와 미래를 담고 있다.

그림 한가운데 강한 기운으로 치솟듯 등장하고 있는 젊은이는 신생 슬라브 국가를 의미한다. 젊은이는 무지개에 둘러싸여 있으며, 예수에 의해 축복을 받고 있다. 그의 손에는 자유와 화합의 화환이 들려 있다. 젊은이는 동시에 전 인류를 향해 꽃다발을 내밀고 있다. 중앙에는 고난을 이겨내고 독립한 여러 슬라브국과 동맹국의 깃발이 펄럭인다. 한 소녀가 작은 손으로 전체 슬라브인과 인류의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의 빛을 지켜내는 모습이 보인다.

민족주의자이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던 무하의 민족주의는 협소한 것이 아니었다. 각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면서 더불어 공존하는 보편적인 인류 평화를 지향했다.

그러나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무하의 정신은 곧 훼손됐다.

1933년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15주년을 맞이하던 해에 위험한 이웃이 등장했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은 전쟁 준비에 열을 올렸다. 1938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호시탐탐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리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해 유혈 사태를 방지하길 바라면서 대다수 국민이 독일인이었지만 1차 대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로 편입돼 있던 주테텐란트 지역을 독일에 양도했다. 독일 국내에서 히틀러의 인기가 더 높아졌고, 이로써 반대 세력들이 히틀러를 견제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 독일의 우경화는 가속화됐다.

1939년 3월 15일, 독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침공해왔다. 무하는 곧바로 체포됐다. 나치는 과거 무하가 프리메이슨으로 활동한 것을 문제 삼았다. 체포, 구금,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노령의 무하는 그해 여름 사망한다.

나치는 일가친척 이외의 사람들이 무하의 장례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했다. 체포, 협박에도 불구하고 10만여명의 인파가 그의 장례식에 모여들었다. 한때 파리를 매혹하던 달콤한 그림을 그리던 아르누보의 거장 알폰스 무하는 체코의 국민 작가로 추앙받으며 조국을 빛낸 사람들과 함께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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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미술평론가 ‘러시아 미술사’ ‘미술의 빅뱅’ 저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28호(13.10.16~10.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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