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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경찰 ‘못 잡는다’ 반복하는 동안, 불법합성물 더 진짜 같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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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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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처음 이번 사건 피해자로부터 (이미지·음성 합성기술인 딥페이크를 활용한) 성범죄물을 받았을 땐 조악했거든요. 그런데 경찰 수사가 지연되는 2년 동안 무섭게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이제는 진짜·가짜 구분이 되지 않아요. (…) 사진 한 장 없는 사람 없잖아요. 누구나 불법합성물 성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만큼 수사기관과 언론의 적극적인 대응이 절실합니다.”



2019년 텔레그램 기반 아동·청소년 성착취 범죄인 ‘엔(n)번방’ 사건을 처음 알린 ‘추적단 불꽃’ 활동가이자 미디어플랫폼 ‘얼룩소(alookso)’ 에디터인 원은지씨는 21일 한겨레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날 경찰이 서울대 동문들의 사진 등을 불법합성해 성범죄 영상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로 같은 학교 졸업생 등을 검거해 검찰에 넘긴 사건의 피해자들을 도와 가해자 찾기에 나섰다. 이 사건 피해자들은 2021년 7월부터 각각 네 군데 경찰서에 신고했으나 각 경찰서는 ‘피의자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수사중지나 불송치 결정을 했다. 피해자들로부터 도와달란 요청을 받은 원 에디터는 2022년 7월부터 2024년 4월까지 일을 마친 뒤 텔레그램에서 가해자와 수시로 접촉하고, 경찰과 공조해 가해자를 유인·검거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경찰이 못하니 (가해자가 누구인지) 단서를 잡으려면 나라도 위장 수사를 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선 경찰서 경찰 한 명이 한해 120건 이상 되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맡는 구조에서 나처럼 대응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노릇”이라며 “24시간 디지털 성범죄 특수전담반 같은 대응 체계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다음은 원 에디터와의 일문일답.



―불법합성물 제작·유포 범죄인 이번 사건에서 우리 사회가 얻어야 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온라인에 (자기) 사진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지 않나. 그런 면에서 이번 사건은 누구나 불법합성물 제작·유포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실제 가해자는 범죄에 대학 졸업 앨범을 활용) 그런데도 아직 이 범죄가 가볍게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구로 만들어진 이미지나 영상을 기반으로 성범죄가 이뤄지기 때문에 피해자의 실제 모습을 담은 기존 성착취 범죄에 견줘 그 피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안이하게 볼 일이 아니다. 2022년 7월에 처음 이 사건 피해자 중 한명으로부터 조력 요청을 받았을 때 받았던 불법합성물과 2023년에 받은 불법합성물 차이가 너무 난다. 2022년만 해도 (합성 정도가) 조악했는데 이젠 진짜와 가짜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경찰 수사가 중단·지연되는 2년여간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는 더 피폐해졌다. 이대로 두면 10년 후에 전 국민이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국가적인 대응이 시급하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가해자는 피해자들에게 자신이 주변 인물이라는 걸 알렸다. 처음 사건을 알고 난 이후 가해자 검거까지 약 3년 동안 피해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자신을 대상으로 이런 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는 존엄이 파괴된다. 너무나 자신처럼 보이는 여성이 영상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한다. 그걸 수시로, 수십장씩 테러처럼 받게 된다. 가해자는 일부러 피해자를 충격받게 하고 이 반응을 통해 희열을 느끼며, 피해자는 이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게 된다. 나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하는 고문관을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 형사사법체계는 피해자의 신체 피해에 초점이 맞춰져 피해자의 존엄을 파괴하는 범죄는 처벌 수위가 높지 않다. 2020년 성폭력처벌법이 개정되면서 허위영상물 제작·반포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생겼지만, 5년 이하 징역 혹은 5천만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 수위가 높진 않다. 피해자에게 남기는 상흔은 너무 큰데 사실상 경범죄 취급을 받는 셈이다. 거기서 오는 괴리감이 너무 크다고 본다. 첨언하자면, 이런 범죄를 흔히 ‘지인 능욕’ 범죄라고 표현하는데 ‘능욕’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해자 입장을 반영한 것이니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한겨레

원은지 에디터가 대학 동문 불법합성물 성범죄 추적기를 담은 전자책 표지.


―피해자가 2021년 7월 첫 피해를 경찰에 신고한 이후 2년 10개월 만에 가해자가 검거됐다. 수사 과정에서의 문제점은.



“엔번방 사건이 공론화됐던 4년 전에도 지인이나 유명인 얼굴과 성적인 영상물을 합성해 유포하는 범죄가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사 상황은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 이 사건 피해자들이 경찰로부터 공통적으로 들은 말이 “텔레그램은 못 잡아요”였다. 경찰이 공통으로 하는 말인 “원한관계나 의심 가는 사람을 추려와야 수사할 수 있다”도 피해자를 상당히 막막하게 한다. 피해자는 지인을 한 명 한 명 의심하면서 추려내야 한다. 그 과정은 괴롭고 끔찍한 일이다. 사실 가해자 검거 단서는 경찰이 잡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이번 사건 피해자도 경찰로부터 단서를 잡아오라는 얘기를 듣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부터 경찰을 대신해 내가 위장수사를 했다. (경찰의 위장수사는 현재 미성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한해 허용된다) 퇴근하고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가해자와 수없이 대화하며 라포(상호 신뢰관계)를 형성했다. 가해자 신원을 특정할 단서를 잡기 위해서였다. 결국 가해자를 유인해 검거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장시간 대화하다 보면 단서가 나오더라. 피해자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아는 나는 가해자를 잡고 싶어하는 마음이 크니 이렇게까지 했지만 한 해 120건 넘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처리하는 일선 경찰서 수사관은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24시간 대응할 수 있는 디지털 성범죄 특수전담반 같은 체계가 필요해 보인다.”



―이런 범죄를 예방하고 피해자 보호를 위해 우리 사회가 참고할만한 선례가 있을까.



“플랫폼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예컨대 타인의 에스엔에스(SNS) 사진을 캡처(갈무리)하면 플랫폼에서 팝업을 띄워 ‘허위영상물 제작 시 처벌 받을 수 있다’고 고지하면 어떨까. 범죄임을 고지하면 향후 범행의도를 입증하기도 수월할 것이다. 최근 미국에 다녀왔는데, 버몬트주에 있는 도시 벌링턴에서는 이런 내용을 담은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목소리를 중앙·지방정부나 국회가 정례적으로 듣는 창구가 있었으면 한다. 미국에는 피해자 또는 조력자(advocate)가 국회나 시청에 와서 정례적으로 의견을 말하는 제도가 있다고 하는데 피해자가 목소리 낼 공식 창구가 있다면 경찰이 피해자 관점을 가지고 수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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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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