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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오순도순 골목길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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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현 | 작가



“몰러, 난!”



씩씩거리며 묻는 나에게 아버지는 모른다고만 답했다. 가뜩이나 좁은 집에 잡동사니가 하나둘 늘어갔다. 버려진 신발이나 옷가지, 주방 식기, 정체불명의 전자 기기까지.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물건들이 집 안과 현관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잡동사니들을 내다 버리려고 하면 버리지 못하게 하니, 나는 잔소리만 늘어갔다. 몰래 내다 버리기라도 하면 어느새 다시 집에 들어와 있는 물건도 있고, 어떤 건 분리수거를 하고 어떤 건 생활폐기물 신고까지 해야 버릴 수 있다. 집에 쓰레기나 다름없어 보이는 잡동사니가 늘어가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다 ‘오순도순 골목길’ 때문인 것 같았다.



오순도순 골목길은 몇달 전, 집 앞 골목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작은 골목 입구에 이름을 알리는 철제 간판이 세워졌다. 주택 담벼락마다 자그마한 벤치가 생겼고, 공간을 구획해주는 화단도 듬성듬성 배치됐다. 10미터도 채 되지 않는 골목은 하루 만에 뚝딱 오순도순 골목길이 됐다. 행정의 주도로 얼렁뚱땅 만든 곳처럼 앙상해 보였다. 싫다는 건 아니었다. 내가 사는 골목에는 노년 1인 가구가 많았다. 벤치가 생기니 볕 좋은 날에는 한두 사람씩 나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요양보호사만 집에 드나들던 할머니도 나와 앉았고, 치와와랑 같이 사는 할머니도 나와 앉았다. 앞집에 사는 폐지를 수집하는 할머니도 자주 나와 앉아 있거나 폐지를 정리했다.



한번은 아버지와 장을 보고 집에 가는 길에 폐지 줍는 할머니를 만났다. 아버지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아버지가 다른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몇달 만에 처음 봤다. 아프고 인지가 저하된 이후, 집에 고립돼 있던 아버지에게도 이웃이 생긴 것 같아서 뿌듯했다. 벤치 몇개만으로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될 수 있다니! 집에 잡동사니가 늘어난 건 그때쯤부터였다.



할머니는 폐지를 비롯해 버려진 물건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다가 쓸 만하지만 용도가 마땅치 않은 물건이 생기면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는 그걸 다 받아 왔다. 그렇게 쌓인 잡동사니들이었다. 출처를 알았다고 한들 할머니에게 잡동사니를 주지 말라는 말은 못 했다. 인사 나누고 안부를 묻는 관계의 매개가 잡동사니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집 안의 잡동사니들이 늘어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픈 것도 아니었고, 할머니와 아버지 관계가 틀어진 것도 아니었다.



“집주인들이 사람들 나와서 대화하고 하면 시끄럽다고 앉지 못하게 한다고 그랬지.” 동네 주민에게 전해 들은 말이었다. 골목길 벤치에는 일반 쓰레기나 재활용 쓰레기가 올라가 있었고, 벤치가 사라진 담벼락도 있었다. 좁은 골목길이기에 집집마다 소음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게 사실이었다. 이제 더는 집에 잡동사니가 쌓이지 않아서 좋았지만, 마음에서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던 장소가 상실됐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벤치에 앉지 않으니 오순도순 골목길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시시하게 끝난 오순도순 골목길을 생각하다가 책 ‘누구도 홀로 외롭게 병들지 않도록’을 꺼내 들었다. 영국 서머싯의 작은 마을인 프롬에서 실험했던 ‘컴패션 프로젝트’의 결과를 보고하는 책이다. 컴패션 프로젝트는 서비스나 의료 중심의 지원이 좋은 삶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됐다. 좋은 관계야말로 건강의 원천이라고 여기며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고 헬스 커넥터와 커뮤니티 커넥터를 양성했다. 관계 속에서 건강관리 방법을 나눴고, 관계의 상호작용이 건강을 촉진하기도 했다. ‘누구도 홀로 외롭게 병들지 않도록’ 하는 실천은 프로젝트가 진행된 2013~17년 프롬의 응급실 입원율이 감소하는 성과를 보였다. 좋은 관계 속에서 외롭지 않은 일상을 보내는 것이 국가 재정의 지출도 줄인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우리 집 앞에서 벌어진 작은 상호작용은 결코 시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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