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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최재천 "소통이요? 수컷이 짝짓기 구애하듯 악착같이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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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다듬은 신간 '숙론' 내고 기자간담회
갈등과 불통으로 끙끙 앓는 대한민국
'토론'이 아닌 '숙론'을 해법으로 제시
한국일보

7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숙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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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선 어떤 주제를 두고 토론하자면 너무 결연해집니다. 사생결단 내듯 싸웁니다. 그러면서 또 말 잘하면 '입만 까졌다'고 부정적으로 봅니다.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상대 얘기에 귀 기울이면서 내 생각을 조절해 가며 합의를 도출하는 것, 누가 옳으냐를 가리는 게 아니라 무엇이 옳으냐를 찾아가는 과정, 그걸 숙론(熟論)이라 불렀으면 합니다."

7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최재천(70)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통섭' '호모 심비우스(공생하는 인간)'처럼 그간 한국 사회에 화두 하나씩을 던져온 최 교수는 이번에 9년간 다듬어 온 책 '숙론'(김영사)을 들고 왔다.

"한국, 토론 대신 숙론이 필요"


'토(討)론'이라서 상대를 토벌하느라 너무 싸워대니, 속으로 고심해 푹 익히는 숙(熟)론이 어떠냐는 제안이다. 최 교수는 "대한민국은 이제 뭐든지 못하는 게 없는 나라가 됐는데 딱 하나, 토론해서 결론 내리고 합의하는 것만은 아직 미숙한 것 같다"며 "국회의원 전원에게 읽히고 싶은 책"이라고도 했다.

책에는 그간 최 교수가 겪은 경험이 녹아 있다. 하버드대 유학 시절 토론식 수업에 깊이 감명받은 이야기, 그래서 토론 수업의 달인으로 꼽혔던 롤런드 크리스튼 경영학과 교수에게서 배운 노하우, 그리고 1994년 귀국한 뒤 대학은 물론,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면서 토론 문화를 접목해보려 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숙론을 고민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례로 최 교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몽플뢰르 콘퍼런스'를 꼽았다. 1990년 넬슨 만델라가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석방됐을 때 남아공 전역은 초긴장 상태였다. 그간 억압당한 흑인들의 보복과 대혼돈에 대한 우려가 넘쳐났다.

'몽플뢰르 콘퍼런스' 숙론의 모범 사례


그때 남아공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꼽힌 22명이 콘퍼런스를 소집했다. 이들은 오랜 논의 끝에 남아공 국민이 선택하는 개혁의 강도와 속도에 따라 남아공의 미래가 플라밍고(포용적 민주주의), 이카루스(포퓰리즘), 레임 덕(무능력), 타조(대표성 결여) 등 4가지 모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제시했다. 그리고 남아공이 플라밍고처럼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모든 정치세력의 협력에 따른 점진적 개혁만이 살 길이라고 국민을 설득했고,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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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민주화의 상징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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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는 숙론을 위한 소통 또한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연에서도요, 짝짓기 하기 위해 수컷이 죽어라 노래 불러도 암컷은 들어줄까 말까예요. 소통은 적당히 하다 마는 게 아니라 상대가 받아줄 때까지 악착같이 하는 겁니다. '저 꼴통들 하고 내가 뭐 하는 짓이냐' 하는 순간 소통은 끝나는 거예요."

저출생 문제, 숙론으로 풀어보자


아름다운 스토리이긴 한데 '빨리빨리 대한민국'에서 어서 결론 내지 않고 곰국 끓이듯 계속 대화를 나눈다는 게 받아들여질까. 최 교수는 "궁극적으로는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한국 사회도 이제 해법 한두 가지로 문제가 풀리던 시절은 지났다.

최 교수는 기회가 된다면 스스로 숙론의 장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첫 무대엔 어떤 주제를 올릴까. '저출생'을 꼽았다. "경제나 인구 쪽 전문가분들 얘기 들어보면 합계출산율이 0.6명대라면 1.0명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조차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들 하세요. 어떻게 보면 답이 없는 문제지요. 그렇기에 온갖 실험적 접근은 물론, 엉뚱한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숙론에 딱 어울리는 주제지요."

조태성 선임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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