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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세상에 어서 와…네 ‘처음’과 자랄 선물을 준비해 봤단다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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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아이의 연약한 살결을 지켜주는 무명 배냇저고리와 턱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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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진 ‘평생도’ 병풍이 있다. 작자 미상이거나 김홍도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대부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맞게 되는 경사스러운 일상의례와 관직 생활을 8폭 병풍에 시간 순서로 그린 그림으로 첫 시작은 돌잡이 장면이다. 색동 돌옷을 입은 사내아이 앞에는 당시 귀했던 붉게 칠한 주칠반이 놓여 있다. 그 위에 활과 화살, 쌀, 책과 붓, 실타래, 떡 등을 올려놓고 돌잡이를 할 참이다. 무엇을 잡든 나쁜 것은 한 가지도 없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 덕성을 갖춘 인물로 강건하게 자라 높은 관직에 오르고 장수하길 기원하는 것들뿐이다.



그림 아래쪽에 분홍 진달래가 피었고 왼쪽 담벼락에 매화인지 살구꽃인지 모르겠지만 화사하게 핀 것을 보면 막 겨울이 지나 봄이 시작된 계절이다. 마치 돌을 맞은 아이의 인생을 생동하는 봄에 비유하듯 말이다.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 혼인을 치르고 좋은 벼슬자리에 나가 부와 명예가 함께 하는 삶을 바라는 옛 그림처럼 아이를 향한 지극한 마음은 요즘도 다르지 않다.





‘처음’이 담긴 보물





조카가 생긴 지인들이 선물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내게 하곤 한다. 잡지기자 경력 중 가장 긴 시간을 육아잡지를 만들며 보냈기 때문이다. 육아도 ‘장비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모 손을 덜어주는 각종 육아용품이 넘쳐나니 어떤 선물이 유용할지 묻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추천은 육아에 도움을 주는 물건이나 고가의 유모차·카시트가 아니다. 그런 거라면 에스엔에스(SNS)나 육아 카페에서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제안하는 선물은 그 속에 담긴 의미와 염원대로 아이의 곁에서 평생 함께하며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아이의 첫 옷인 배냇저고리나 아이와 엄마를 연결해주던 탯줄이 떨어졌을 때 보관할 수 있는 보관함 같이 탄생을 축하하고 세상과 첫 인연을 맺은 것들을 귀하게 준비해주는 것이다. 배냇저고리는 꼭 필요한 출산준비물이라 이미 마련돼 있겠지만 특별한 선물로 ‘규방도감’의 무명배냇옷과 무명턱받이를 추천한다. 규방도감의 무명은 여러번 빨고 삶아 연약한 아기 피부에 닿아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통풍으로 체온을 조절해주는 특별한 소재다. 조선 왕실에서 왕의 대를 이을 원자가 태어나도 배냇저고리는 새 원단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조정관료 중에서 무병장수한 사람이 입었던 무명으로 옷을 지어 원자의 장수를 기원했다. 오래 입은 무명 옷의 감촉이 새 옷감보다 아기 피부에도 한결 편안했을 것이다. 규방도감의 배냇저고리는 넉넉한 크기로 아이 배를 든든하게 덮어주고 앞섶 부분에는 태어난 해에 따라 띠 문양 자수를 놓아 장식했다. 무명턱받이에는 복숭아를 수 놓았는데, 복숭아는 행복과 부귀, 무병장수를 상징하고 전염병을 쫓는 신성한 과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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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냇머리와 유치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윤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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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탯줄과 배냇머리, 자라면서 빠지는 유치를 담아 평생 보관할 수 있는 함도 이모·고모·삼촌이 선물하기 좋은 공예품이다. 예로부터 귀중한 것을 보관하기 위해 제작한 함의 전통을 이어받아 공예가가 정성스럽게 제작한 것이라면 그 가치를 더해줄 것이다. 얼마 전 리움미술관 스토어에서 만난, 이름도 고운 ‘윤슬함’이 좋은 예다. 이 작품은 국가무형문화재 두석장(소목가구의 경첩과 손잡이를 합금 금속으로 제작하는 장인) 이수자 박병용 작가와 디자이너 김주일 디렉터의 협업으로 제작한 전승공예의 재해석이다. 이 함은 두석의 소재와 제작 방식이 오롯이 주인공으로 빛난다. 탯줄을 보관하는 풍습은 우리만의 전통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태(胎)를 묻는 풍습은 신라 때 시작됐다. 중국의 풍습은 아니다”라고 기록했으며 조선 왕실과 사대부 가문에서는 태반과 탯줄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 길지에 묻어 보관하는 의례에 정성을 다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아이의 서사를 만들어주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내게도 45년 간 간직한 배냇저고리와 탯줄이 있다. 생명의 시작을 보물처럼 보관해주신 부모님을 생각한다. 두 분 모두 이 세상에 없어도 마음으로 꽤 의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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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탄생을 특별한 서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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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쓸 은숟가락과 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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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사진, 돌사진, 손도장, 발도장 등 아이의 추억 중 액자에 담길 만한 것을 뻔하게 떠올리게 되지만 ‘모리함'의 액자는 남다르다. 모리함은 장황이나 배첩 등 한국의 전통 표구 기법을 기반으로 ‘당신의 이야기가 작품이 되는 곳’이라는 수식과 함께 액자·병풍·족자 등을 제작하는 곳이다. 지금은 매장이 서울 회현동에 있지만 4년 전 이태원 골목 안에서 만난 모리함의 쇼윈도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액자를 보고 멈춰섰던 기억이 있다. 배냇저고리와 버선, 탯줄과 초음파 사진 등 아이를 기다리고 만났던 순간의 기억이 담긴 액자였다. 평범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담긴 물건도 근사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여기에 담길 만한 물건들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호호당'에서 선보이는 은 이유식 숟가락과 실타래 함에 담긴 밤 문양 금반지, 귀여운 버선 등을 꼽을 수 있다. 아이의 입에 닿는 첫 숟가락이 플라스틱이나 실리콘이 아닌 건강하고 안심할 수 있는 은 소재라면 돌반지처럼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가치가 있지 않을까. 호호당에서는 가제손수건, 싸개이불, 배냇저고리, 메밀베개 등 출산용품을 비롯해 아이 한복까지 다양한 선물을 고를 수 있다.



16세기 조선 시대 할아버지가 손자를 손수 키우며 쓴 육아일기 ‘양아록’에는 아이 탄생의 기쁨을 시작으로 이가 나고 혼자 앉게 된 순간과 역병에 걸려 고생한 일, 공부를 소홀히 한 아이를 훈육한 것까지 자세히 적혀있다. 짧고 소소하더라도 아이의 시간이 글로 담긴 육아 일기도 좋은 선물이다.



글·사진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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