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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55세에 유배 당한 추사… 절대고독 속 ‘세한도’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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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손관승의 영감의 길]

제주 별도봉에서 돌아본

김정희 세한도 18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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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별도봉 산책코스. 왼쪽은 제주항이고 그 옆으로 화북포구. /손관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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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를 보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가 뜻밖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작품 탄생 180주년을 맞아 오랜만에 공개되었다는 사실보다 내가 주목한 건 59세라는 작품 당시 추사의 나이였다. 마침 퇴직 예정자를 위한 제주도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으니 둘 사이의 동질감을 발견한 것이다. 직장인들은 대개 ‘세 가지 파도’를 동시에 맞는다. 정년퇴직, 몸과 정신이 지쳐있는 번아웃, 환갑의 삼각파도다. 퇴직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추사의 제주도 유배길은 통찰력을 주기에 충분하다.

명문 가문 출신에다 총명함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추사에게 일생일대의 고난이 닥친 것은 그의 나이 55세. 청나라로 파견할 동지부사에 임명되어 30년 만에 북경을 다시 방문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젊은 시절 북경에서 중국 지식인들에게 “경술과 문장이 해동(조선)에서 제일”이라는 극찬을 들었던 추사였다. 그런데 정치권에 일진광풍이 몰아치더니 느닷없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해외 출장 준비하고 있는데 유배를 떠나라는 황당한 명령,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표현을 빌리면 ‘벽돌로 인생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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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원악도(遠惡島)라고 불릴 정도로 먼 유배지였고 대정현은 특히 생활 여건이 열악했다. 일명 '강도순의 집'으로 알려진 추사의 대정 유배거처. /손관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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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추사가 제주에 도착한 것은 1840년 9월 27일 저녁. 해남에서 함께 배를 탄 사람들 대부분이 멀미가 나서 고생했지만, 추사는 밥도 먹고 뱃머리에서 선장이나 뱃사공과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기록돼 있다. 추사의 도착 장소는 어디일까? 일명 별도포구로 불리는 화북포구. 제주목 관아에서 가장 가까워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며 1653년 태풍으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서울로 압송된 출발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주변이 개발된 데다 현대식 제주항에 밀려 항구로서 기능은 축소되었기에 옛 자취를 느껴보려면 별도봉 산책길을 걷는 편이 낫다. 뱃사람의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당(海神堂), 연기를 통한 비상 신호 수단인 연대(煙臺)가 남아 있고, 끝없이 이륙하는 항공기와 푸른 바다를 건너는 선박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근처에 국립 제주박물관과 우당도서관과 산지 등대까지 있으니 환상적인 산책 코스다.

이 산책길에서 가장 높은 별도봉은 제주도가 발표한 오름 368곳 가운데 가장 특별한 사연을 간직하였다. 인근 사라봉 옆에 별도로 솟은 오름으로 생각했는데 한자로는 별도봉(別刀峰)이라 한다. 당시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이들에게 음식과 빨래 등을 거들어 주는 배수첩(配修妾·일종의 현지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임기 혹은 유배가 끝났을 때 제주도에서 함께 살던 여인과 가족을 떼어놓고 갔기에 남은 가족은 오름 높은 곳까지 올라 육지로 떠나는 배를 피눈물로 배웅했다고 한다. 즉 칼로 끊는 것처럼 생이별한 장소라는 뜻이다. 추사는 애처가답게 현지에서 여자를 구하지 않고 지냈으나 유배 3년 차에는 부인마저 사망하는 불운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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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별도봉 오름. 정상 우측 아래는 제주항. /손관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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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원악도(遠惡島)라고 불릴 정도로 먼 유배지였고 그중 대정현은 특히 생활 여건이 열악했다. 그가 가장 오래 거주했던 일명 ‘강도순의 집’의 거처에 귤중옥(橘中屋)이라 당호를 지었다. 다른 꽃은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이곳에 있으며 겉과 속이 다 깨끗하고도 향기로운 지조를 기리는 뜻이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잦은 질병, 무엇보다 세상과 절연되어 있다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하루가 한 해같이 긴데, 온종일 듣는 것은 까마귀와 참새 소리뿐”이라고 적고 있다. 요즘도 제주도에는 까마귀가 흔하다. 남들은 달려가는데, 혼자 멈춰 있다는 느낌처럼 힘든 것도 드물다. 40대 중반에 공직에서 추방된 마키아벨리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라고 적고 있지 않았던가.

완장을 채워주었을 때 인간의 감춰진 얼굴이 나타난다면, 고난을 겪을 때 그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된다. 유배자들은 중앙의 권부에서 불러줄 날만 기다리며 울분의 세월을 술이나 마시면서 현지인들과 담쌓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추사는 독서에 매진하고 현지인을 제자로 삼으며 자기 수양의 기회로 삼았다. 세상은 그를 외면했어도 드물게도 평생 그를 존경한 이 가운데 한 명이 제자 이상적.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중국을 다녀온 전문가였다. 출장 때마다 청나라의 해외 문물 최신 소개서 ‘해외도지(海外圖志)’ 등 많은 책을 구해 추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제주도 유배 생활 5년째인 1844년, 제자의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게 되니 바로 ‘세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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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59세 때 만든 작품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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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마키아벨리에게 해직이 없었다면 ‘군주론’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50대 추사에게 유배가 없었다면 ‘세한도’는 탄생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카잔차키스가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것 또한 환갑 무렵이다. 흔히 자유인의 상징으로 해석하지만, 이 작품은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 환갑과 부활 정신을 말하고 있다. 포도를 짓이겨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포도주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짓이김당하는 과정을 통해 불후의 명작이 태어난다. 글은 뾰족할수록, 인격은 둥글수록 좋다. 고난은 개성 강한 글을 쓰게 만들지만, 인품은 원만하게 변화시킨다. 별도봉에서 오름의 정신을 되새겨 본다. 올라갈 때는 강건해지고 내려갈 때는 현명해져야 한다. ‘올강내현’, 인생의 법칙도 그러하지 않을까?

[손관승 글로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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