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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이병천 칼럼]불로소득주의를 넘어, 공공이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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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번역작업이 완성된 무렵에야 나는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의 한국어판 서문을 요청했다. 브렛 크리스토퍼스는 대단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메일을 보낸 다음날 바로 답신이 왔는데 저자서문까지 함께 보내왔다. 번역서 저자서문 때문에 고생을 바가지로 하고도 끝내 서문을 받지 못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너무 뜻밖이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분량이 너무 짧고 간명했다. 하룻밤에 쓴 서문이니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이 서문으로 끝내야 하나 다시 요청해야 하나 생각이 복잡했다. 출간된 책에 수록된 저자서문은 결국 내가 욕심을 이기지 못해 재요청을 한 결과 ‘얻어낸’ 서문이다.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는 사실 여러모로 읽기 쉽지는 않은 책인데, 최종 저자서문은 안내 글로 손색이 없다. 서문에서 저자는 불로소득주의로의 타락, 즉 자본의 생산적 기능마저 저버린 지대추출자본(rentier capital)의 논리가 역사적 자본주의의 본성에 내재해 있고 따라서 영국의 어두운 이야기가 곧 한국이야기가 될 수도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크리스토퍼스는 매우 열정적인 학자다. 그는 현대 마르크스경제학 발전의 새 지평을 연 데이비드 하비의 후속세대 학자로서 기본선에서 하비의 성취 위에 서 있지만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하비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첫째, 하비는 예민한 감수성으로 마르크스의 시야 밖에 있는 지대추출자본의 세계에 대해 주목하면서도 나름의 약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크리스토퍼스는 그 한계를 벗어던지고 아예 불로소득자본주의론을 새롭게 구성하는 길로 나아갔다. 이는 하비가 미처 하지 못한 작업으로 하비의 ‘내파’(內破)가 일어난 모양새다. 둘째, 사람들은 하비의 창조적 자본론해석과 박탈을 통한 축적 등 예리한 신자유주의 비판에 경탄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제도적 다양성론이 미약하고 복잡한 전환과정 및 전환역량 문제를 건너뛰는 것에 답답해한다. 반면 크리스토퍼스는 더 땅으로, 전환적 제도론으로 내려온다. 우리는 그에게서 좀 더 손에 잡히는 제도적,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자의 면모를 보며 이 대목에서 사람들의 갈증에 응답한다. 이는 포스트불로소득자본주의로 가는 4가지 대안정책 패키지(반독점 경쟁정책, 조세정의정책, 복지·생태와 선순환하는 산업정책, 자산소유구조의 재편정책)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복합적 대안정책 구색은 진보적 자유주의와도 공유점을 갖고 있지만 주로 조세정책에 집중한 피케티와는 결을 달리한다.

그런데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는 자산과 지대 유형을 중심으로 짜여 있는 책이라 자칫 놓칠 수도 있지만 크리스토퍼스는 우리 시대 불로소득주의 문제를 일관되게 공공성의 파괴와 내일의 공공국가 재창조라는 관점에서 사고한다. 일관되게 국공유자산과 커먼즈의 확장, 공공협력, 거버넌스의 개선과 민주적 통제를 추구한다. 바로 이런 지향이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저서들 <뉴인클로저> <포트폴리오에 담긴 우리의 삶> <가격은 틀렸다-자본주의는 왜 지구를 구하지 못할까> 등을 관통한다. 특히 에너지 전환문제에 개입한 마지막 저서는 큰 반향을 얻고 있고 국내 공공재생에너지 논의와도 공명한다.

저자는 통념과는 매우 다른 주장을 한다. 좌파의 지배적 통념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본성상 반생태적이다, 따라서 기후생태위기를 극복하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논리다. 또 다른 통념은 재생에너지 가격이 하락하면 에너지전환이 원활해지므로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보조금이 전환해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스의 생각은 다르다. 문제의 핵심은 비용 문턱이 아니라 수익성 문턱, 또는 이윤 문턱이다. 비용문제를 넘어, 여타사업에 견주어 좋은 돈벌이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사기업투자+정부보조금 틀의 근본한계다. 저자에 따르면 국가만이 재생에너지투자를 빠르게 늘릴 재정수단과 물류 및 행정 능력을 모두 갖고 있으므로 국가가 재생에너지 인프라의 소유와 통제에 기반해 전환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폴라니의 통찰에 따라 노동, 토지, 화폐만이 아니라 전기도 허구적 상품화를 탈피해 탈상품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윤석열 정부 아래 전방위적인 퇴행이 일어났는데 제정신 있는 선진국 정부치고 한국처럼 정부가 긴축재정 기조를 고수하고 사기업과 시장에 맡기면 대전환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 것처럼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정부가 앞장서서 대규모 공공투자를 실행하면서 에너지전환과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조하려고 나선다. 공동투자를 주도해 주저하는 민간투자도 유도한다. 크리스토퍼스는 이런 방식조차 허점을 갖고 있다고 짚는다. 한국은 정말 갈 길이 멀다.

경향신문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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