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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광개토왕비, 왜의 한반도 지배 증거”(?)…뿌리 깊은 日 고대사 왜곡 [일본 속 우리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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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 세계 5대 자부 동양학 연구기관”

세계일보

일본 도쿄 분쿄구 동양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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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분쿄구 동양문고 박물관은 독서인이라면 가볼 만하다. 단정한 갈색 표지의 책들이 빽빽한 2층 높이 서가에 마주하면 책 속에 파묻힌 듯 싶다. 설립자 이와사키 히사야-미쓰비시 기업 3대 총수-가 G.E.모리슨이라는 호주인에게서 1917년 구입한 2만4000여 권의 일부다. 모리슨 컬렉션은 100만 여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동양문고의 근간이라 한다.

자기 소개엔 자부심이 철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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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문고 모리슨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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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 최대의 동양학 전문도서관이자 연구기관이다. 장서 중에는 국보, 중요문화재 등도 포함돼 동양학에 관련된 컬렉션으로서는 양질 모두 국내(일본) 최고수준이다. 대영도서관, 프랑스국립도서관 동양부문,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동양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소와 세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동양학의 전당이다.”

세계 5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키히토 상왕 부부가 방문한 적이 있어 일본에선 상당한 이름값을 가진 곳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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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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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반도 지배 정당화, 광개토왕비문 오독

한국인 관람객은 1층 오리엔탈홀은 일단 건너 뛰고, 모리슨 컬렉션이 있는 2층에 먼저 가길 권한다. 오리엔탈홀에 전시된 광개토왕비 탁본에 빈정이 상해 관람 자체가 불쾌해질 지 몰라서다. 탁본은 20세기 초 일본 고고학계를 이끌던 학자 중 한명으로 한반도에서도 활동했던 우메하라 스에지가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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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문고 오리엔탈홀에 전시된 광개토왕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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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문에 대한 동양문고의 설명부터 보자.

“약 1800자의 한자로 기록돼, 4세기말부터 5세기 초에 걸친 한반도의 역사 뿐만 아니라 당시 ‘왜’라 불린 일본과의 관계를 아는 데도 중요한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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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의 일본 관련 기록을 설명한 동양문고 패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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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문고의 관심이 광개토왕비문이 서술한 일본과의 관계에 쏠리는 건 당연하다.

“뒤에서 세번째줄의 문장을 봐주세요. 왜국(일본)의 세력이 한반도에 도달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통설’이라고 밝히며 해당 문장의 해석도 덧붙였다.

“백제와 신라는 오래전부터 고구려의 종속국으로, 고구려에 공물을 바쳐왔고 391년에 왜가 와서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지배했다. 396년 광개토왕은 스스로 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 성을 공격해 떨어뜨렸다.”

왜의 한반도 도달과 백제, 신라 격파 지배를 언급한 것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의미다. 일제가 한반도 지배의 역사적 정당성, 운운하며 제기했던 ‘임나일본부설’(일본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었다는 설)에 다름 아니다.

19세기 말 광개토왕비가 발견되자 일본 학자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탁본을 동양문고에 기증한 우메하라를 비롯해 도리이 류조, 세키노 타다시, 이마니시 류, 이케우치 히로시 등 내노라하는 학자들이 직접 방문하고, 보고서를 썼다. 이들은 이 문장을 진구황후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일본의 고대역사서)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광개토왕비를 일본으로 이전하려는 시도까지 벌였다고 한다. 2004년 열린 고구려연구재단(지금의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 서양인 학자는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을 포함해 메이지시대(1867∼1912년) 일본의 역사 서술이 “국가의 정치적 필요성에 복종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한국 학계가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해당 문장 해석은 광개토왕비를 둘러싼 가장 뜨거운 논쟁이 됐다. 일제의 비문 조작설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한국 학계는 대체로 한반도에 건너온 왜를 고구려가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했다고 해석한다.

4세기 일본 상황을 보면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은 성립하기 어렵다. 초기 중앙집권적 형태를 갖춘 것이 5세기 초이고, 6세기에도 규슈 지방 세력의 방해로 바다를 건너기가 어려웠던 야마토 정권엔 그럴 역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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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국립박물관 헤이세이관의 고대한반도 관련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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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국박, “선진성 보여주는 백제와의 교류”…엇갈리는 시선

고대의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활발하게 교류했다. 일본 박물관에는 이런 사실을 증언하는 유물들이 적지 않다. 이런 유물들을 어떻게 보여주고, 설명하고 있을까. 한반도의 영향을 부정하고, 예술적·역사적 가치를 깎아내리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은 아닐까. ‘그럴 것!’이라는 인상을 대체로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가?’ 싶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일본 최대, 최고 박물관으로 꼽히는 도쿄국립박물관이 헤이세이관에 전시한 한반도에서 전해지거나,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만들어진 유물을 어떻게 설명했는 지를 보자.

“한반도 남부의 영향으로 이와 같은 칼자루 머리를 가진 큰 칼이 일본 열도에 보급되었다.”

후쿠오카현 6세기 고분에서 출토된 ‘봉황고리 모양 칼자루 머리’에 대한 설명이다.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에타후나야마 고분 출토 장신구에 대해서는 “한반도 남부에서 전래된 것이다. 피장자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금은제 치레걸이는 한반도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제품들”, “이들 출토품은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왕권과도 교류했던 지방호족들의 활동과 선진성을 다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물을 간단하게 소개한 전시물 캡션에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로부터 받은 영향, 당시 일본에 비해 발달한 한반도의 선진성 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비단 도쿄박물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도쿄박물관의 고분출토 유물 설명과 동양문고의 광개토왕비문 설명에서 보이는 차이는 한·일 고대사를 다루는 일본의 태도에 엇갈림이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엇갈림 속에서 100여 년 전 한반도 지배 정당화를 위해 일제가 창작한 역사관이 지금도 여전함을 확인할 수 있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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