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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유목민 천막 옆엔 푸른 모스크 지붕… 눈부신 코즈모폴리턴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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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시공 초월한 문명의 용광로… 카자흐스탄을 가다

조선일보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문화 유적인 투르키스탄의 호자 아흐메드 야사위의 영묘. 유목민에게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 수피즘 사상가의 넋을 기려 티무르 제국 시대에 만들었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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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라는 단어에 이질감부터 느낄지도 모른다. 황량한 평야, 유목민들의 거친 삶.... TV와 책, 인터넷으로 접한 피상적 이미지들 때문이다. 현장은 정반대였다. 눈부시도록 푸른 세상과 접하기까지 여섯 시간이면 충분하다.

인천공항을 날아오른 비행기가 카자흐스탄의 항공 관문 알마티 활주로에 착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 전체 면적의 68%를 차지하고 서유럽 전체 넓이와 맞먹는 세계 9위 영토 대국. 이 광대한 땅은 흉노·유연·돌궐·몽골 등 말발굽으로 세계를 뒤흔든 유목·기마 민족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노마드의 삶을 면면히 이어오면서도 유일신 알라를 믿는 외래 종교 이슬람을 국민적 신앙으로 받아들인 코즈모폴리턴의 땅이다.

카자흐스탄에는 사냥용으로 길들인 독수리가 비상하는 하늘 아래, 모스크의 푸른 돔과 말젖으로 담근 술이 익어가는 유목민 천막, 현대적 고층 건물이 공존한다. 문명의 용광로다. 카자흐스탄에서는 때때로 하늘을 올려보기를 권한다. 국기 바탕색이기도 한 비현실적 파란 하늘이 여행자가 지금 별세계로 진입해 있다는 설렘을 북돋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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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키스탄 외곽의 유적지 오트라르의 성벽. 칭기즈칸 세력에 의해 멸망한 호라즘 왕국 등 이 지역 제국의 흥망성쇠 역사가 담겨 있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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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 민족의 영혼의 고향, 투르키스탄

“칭기즈칸의 응징은 처절했어요. 자신에게 도발했다는 이유로 펄펄 끓는 은(銀) 물을 살아 있는 사람의 눈과 귀에 들이부었습니다.”

카자흐스탄 남부 투르키스탄 외곽의 중세 유적 ‘오트라르’에서 문화유산 해설사가 13세기 몽골에 정복당한 호라즘 왕국 고관들의 최후를 야사로 풀어냈다. 푸른 하늘 아래 웅장하게 펼쳐진 성채와 집터, 곳곳에 복원한 유목민 생활상, 실제 크기로 세워놓아 진짜로 착각한 낙타와 상인들의 동상 때문에 이야기보따리가 몰입감을 더했다.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야외 이머시브(몰입형) 공연장이랄까. ‘투르크족의 땅’이라는 도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중앙아시아는 물론 튀르키예와 캅카스까지 아우르는 투르크족 역사가 펼쳐져 있다.

근대 공화국으로서 역사는 30여 년에 불과한 카자흐스탄은 이곳을 민족혼의 발상지이자 관광 명소로 육성하고 있다. 여행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으면서 ‘사람 때’가 덜 탄 지금이 여행의 최적기일 수도 있다. 발길 닿는 곳이 모두 야외 박물관인 이 도시의 으뜸 랜드마크는 15세기 초 완공된 이슬람 건축물 호자 아흐메드 야사위의 영묘(靈廟). 삭막한 평원에 푸른 색 돔을 머리에 얹은 14층 아파트 높이(39m) 건축물의 외벽은 아랍어 경구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유목민의 무슬림화에 크게 기여한 수피즘(신비주의를 중시하는 이슬람 분파) 사상가 아흐메드 야사위의 넋을 기리기 위해 티무르 제국기인 1389~1405년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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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키스탄의 호자 아흐메드 야사위의 영묘 부근에 세운 모스크. 돔은 국가 상징색인 푸른색으로 칠했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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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갈아넣은’ 페르시아풍 건축술은 사마르칸트 등 다른 중앙아시아 도시의 건축물 전범이 됐다. 이후 러시아에서 소련, 다시 근대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나라가 바뀌는 동안에도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킨 이 영묘는 우리나라의 불국사, 중국의 자금성, 프랑스의 개선문, 인도의 타지마할 같은 국가 랜드마크가 됐다. 이곳을 중심으로 볼거리들의 동선이 짜여 있다.

옛 건물만 있는 게 아니다. 2021년 문을 연 신생 박물관인 ‘대초원 박물관(Great Steppe Country Museum)’에서는 다양한 쌍방향 시청각 전시물로 투르크 역사를 살필 수 있다. 고대 투르크 전설에 따르면 태곳적 생명의 나무인 ‘바이테렉’에 ‘삼룩’이라는 새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알을 낳았다. 나무 아래 살고 있는 용이 알을 삼킬 때마다 삼룩은 계속 알을 낳았다. 선과 악의 무한 전쟁, 낮과 밤, 계절의 끝없는 순환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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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전설에 등장하는 새 '삼룩'의 황금빛 알을 모티브로 만든 투르키스탄의 체험형 시설 '플라잉 시어터'.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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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룩의 금빛 알을 모티브로 만든 입체형 극장 ‘플라잉 시어터(Flying Theater)’에서는 새와 한 몸이 돼 수천년 시공간의 벽을 훨훨 뛰어넘으며 고대 투르크인들의 세상을 탐험한다. 그 어떤 4D 영화보다도 짜릿하고 황홀하다. 어스름이 깔려 암흑천지가 돼도 두렵지 않다. 티무르 시대 건물풍으로 지은 종합 레저 시설 ‘카라반 사레이’에 빼곡하게 들어찬 식당과 숙소가 일제히 불을 밝히니까. 낙타에 짐을 잔뜩 싣고 동서를 오가던 실크로드 카라반들이 여장을 풀던 오아시스 도시의 모습이 재현됐다. 숙소와 가게는 깨끗하고 쾌적하지만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많아 현지 통화(텡게)를 넉넉히 준비하는 게 좋다.

◇초원의 오아시스, 심켄트

투르키스탄을 상징하는 아흐메드 야사위처럼 심켄트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도 있다. 14세기 유목민 지도자 ‘바이디베크 비’다. 갈라져 분열하던 투르크 소수민족들을 단합하고 융합시켜 오늘날 카자흐인의 근간을 형성시켰다. 그의 이름을 딴 23m 높이 동상(기단 포함)이 서 있는 전망대에 서면 사막 속 오아시스처럼 펼쳐져 있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 황토빛 웅장한 성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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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심켄트의 중앙 모스크. 널찍한 광장 앞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 모양의 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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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튀르키예·우즈베키스탄·러시아 등에서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는 곳이 옛 성채(Old Citadel)이다. 심켄트 일대가 러시아 제국에 복속되던 영욕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19세기 중앙아시아 정벌을 이끈 러시아 제국 장군 미하일 체르냐예프는 카자흐 세력 최후의 보루이자 철옹성이던 이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한밤중 물 배급용 관을 통해 침입하는 기습 작전으로 요새를 접수한다. 러시아 치하에 들어간 뒤 폐허가 됐던 요새 터에 대한 발굴 및 복원 작업이 몇 년 새 본격화하면서 관광객과 답사객들의 ‘핫플’이 됐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제정 러시아보다 훨씬 앞선 실크로드 시대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유물들까지 대거 발굴되면서 천년 역사를 보여주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 됐다. 피정복의 아픔이 감도는 요새 정상, 러시아군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한 카자흐 전사 동상의 시선 너머로 초대형 푸른색 국기가 펄럭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매우 강렬한 미장센이다.

◇현대건축 거장들의 각축장, 아스타나

수도 아스타나는 젊음과 파격이 넘치는 야외 현대건축 전시장이다. 1997년 국토 균형 발전을 꾀하며 동남부에 치우친 최대 도시 알마티에서 1200여㎞ 떨어진 중북부 아크몰라(흰 무덤이라는 뜻)로 천도했고, 수도라는 뜻의 ‘아스타나’로 명명했다. 동서가 만나는 유라시아 중심 도시를 모토로 삼아 종합적 설계는 일본 출신의 건축 거장 구로카와 기쇼(1934~2007)가 맡았다. ‘건물은 사각형이어야 한다’는 통념을 벗어나 실험 정신 가득한 건축물들의 경연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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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아스타나의 랜드마크인 바이테렉 기념탑. 고대 카자흐스탄 전설을 모티브로 설계했다. 탑 높이 97m는 이곳이 카자흐스탄의 새로운 수도가 됐던 1997년을 상징한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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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창의적 도시 디자인을 조망하기 딱 좋은 곳이 바이테렉 기념탑. 생명의 나무 바이테렉을 실제 지구에 구현한다는 콘셉트로 2002년 완공된 97m짜리 타워다. 높이는 천도가 이뤄진 1997년을 상징한다. ‘삼룩’이 낳은 알을 모티브로 삼은 전망대에서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유리 피라미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프리츠커상을 받은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평화와 화합의 전당’이다. 박물관·오페라극장 등을 아우른 이곳에서는 카자흐스탄이 3년마다 개최하는 세계 종교 지도자 회의가 열린다.

파격적 외관의 볼거리로는 미래 에너지 박물관 ‘누르 알렘’을 빼놓을 수 없다. 2017년 ‘미래 에너지’라는 주제로 중앙아시아 첫 국제 박람회 기구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행사장 가운데 들인 상징 건물이다. 높이 100m, 지름 80m에 달하는 거대한 구 형태의 건물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미래 아스타나의 상상도가 펼쳐진 꼭대기 층은 속이 뻥 뚫린 건물 내부를 조망하기 좋은 관람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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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아스타나의 중앙 모스크. 아랍의 모스크와 달리 카자흐스탄을 상징하는 푸른색과 전통 문양 등으로 내부를 꾸몄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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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문화를 모두 품으려는 카자흐인들의 욕심은 튀르키예나 아랍 국가 못지않은 장엄한 모스크까지 들였다. 돔 지붕뿐 아니라 내부까지도 푸른색으로 치장된 아스타나 중앙 모스크다. 2022년 8월에 문을 연 이곳은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 모스크다. 여느 모스크의 장식에서 볼 수 있는 아랍어 쿠란 성구나 아라베스크 문양 대신 양의 뿔을 형상화한 카자흐 특유의 전통 패턴으로 장식된 초거대 예배당에서 아이들은 장난치며 뛰어다니고 엄마들은 앉아서 두런두런 수다를 떤다. 이들에게 이슬람은 절대자에 복종하는 경건한 신앙이 아니라 이웃·친지들과 어울리는 친숙한 일상이라는 듯이.

[색동옷 입고 흥겨운 노래… 봄과 함께 온 유목민의 새해]

올 9월엔 ‘유목민 올림픽’… 노마드 게임 개최

유목민의 시간은 특별하게 흘러간다.

낮밤의 길이가 똑같아지면서 가축 먹일 풀이 돋기 시작하는 춘분이 이들에겐 새해의 시작. 중앙아시아에서 카프카스에 이르는 지역에서 쇠는 설 ‘나우르즈(Nauryz·카자흐식 발음)다. 세계에서 쇠는 인구가 3억명에 이르다 보니 유엔 사무총장도 해마다 축하 메시지를 낸다. 올해도 닷새 연휴 동안 전역이 축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이 절기를 쇠는 나라 중에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진 카자흐스탄은 ‘나우르즈의 본령’을 자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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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카자흐스탄의 설인 나우르즈를 맞아 투르키스탄에서는 형형색색의 전통 옷을 입은 예술인들의 공연이 펼쳐졌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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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풀을 모티브로 한 장식물이 곳곳에 등장했고, 형형색색 전통 의상으로 차려입은 프로·아마추어 예술가들의 민속 공연이 떠들썩하게 펼쳐졌다. 투르키스탄의 한 유르트(유목민들이 사는 이동식 천막)를 찾으니 정성껏 장만한 음식을 풍성하게 올려놓고 노래와 이야기꽃을 피웠다. 말젖·곡물·말고기 등 일곱 재료를 넣고 달여낸 카자흐판 떡국 ‘나우르즈 코제’를 비롯해 말젖을 발효해 만든 음료 ‘크므즈’, 수수 알갱이를 꿀과 버터에 버무려 둥글게 뭉친 ‘마이소크’, 밀가루 반죽에 다짐육으로 속을 채운 중앙아시아식 만두 ‘투슈파라’ 등의 전통 음식에 상다리가 휘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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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르즈를 맞아 투르키스탄에 만들어진 유르트에서 전통 음식을 장만한 여성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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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고기 요리 중에 으뜸으로 치는 말고기도 부위별로 테이블을 채웠다. 잔칫상에 음악이 어찌 빠지랴.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영혼의 악기로 불리는 두 줄짜리 현악기 ‘돔브라’ 연주에 얹은 유목민들의 낭랑한 가창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설날은 지나갔지만 흥겨운 분위기는 초가을까지 만끽할 수 있다. 유목민들의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세계 노마드 게임이 오는 9월 8~14일 아스타나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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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재료로 정성껏 만든 명절 음식상이 차려졌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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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창설돼 올해로 5회째인 이번 대회는 지구촌이 코로나 그늘을 벗어난 뒤 처음 열리는 대회다. 100여 국에 선수·임원 4000여 명 등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로 펼쳐진다. 염소 사체를 차지하기 위해 말을 타고 격렬하게 몸싸움하는 ‘콕파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잠비 아투’ 등과 함께 한국의 전통 스포츠 씨름도 스무 개 정식 종목에 당당히 포함돼 있다. 대회를 전후해 다채로운 문화 행사들도 마련될 예정이다.

[카자흐스탄=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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