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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경수로 제안'에 솔깃 美, YS는 "핵 없단 건 거짓말"…93년 北 NPT 탈퇴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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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31년 만에 공개된 1993년 외교문서에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미 협상 과정이 담겼다. 한때 미국은 "북한이 제안한 경수로 문제를 중요한 돌파구"로 보고 대북 협상에 힘썼지만, 북한은 "핵무기가 없다"는 거짓 주장을 하며 '평화 협정 체결', '균형 정책 약속' 등을 요구했다. 한국은 북한의 태도에 꾸준히 의구심을 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갈루치 "北의 커브볼…돌파구 가능성"



북한은 1993년 3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압력과 한·미의 팀 스피릿 훈련에 반발해 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후 같은 해 6월 미국 뉴욕에서 로버트 갈루치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당시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 간 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렸다. 한 달여 뒤인 7월에는 제네바에서 2차 고위급 접촉이 이뤄졌고, 북한은 "현재 가동 중인 모든 흑연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 데 미국이 협조한다면 모든 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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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북·미 2차 고위급 회담 합의에 처음 담긴 '경수로 지원' 문제는 이듬해 한반도 전쟁 고비를 넘겨 어렵사리 성사된 3차 회담에서 역사적 '제네바 합의'의 핵심 사항이 됐다. 강석주 전 노동당 비서와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가 1994년 제네바 합의에 서명하는 모습. 조선중앙TV.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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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루치 당시 차관보를 비롯한 미국 협상팀은 북한의 경수로 제안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회담 직후 당시 한국의 주제네바대사와 만난 갈루치 차관보는 북한과 고위급 회담 내용을 설명하며 "북측은 '경수로 관련 제안은 김일성의 구상'이라고 하면서 현재 운용 중인 원자로와 건설 중인 원자로 및 핵무기 관련시설을 모두 폐기할 용의를 표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경수로 문제는 야구 경기로 비유한다면 초구에 들어온 커브볼처럼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며 "북측의 제안은 핵 비확산을 향한 진전(development)으로 볼 수 있으므로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갈루치 당시 차관보는 이후 한승주 당시 외무장관과 통화하면서 "작지만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며 "경수로 문제는 미국이나 한국 정부에 하나의 중요한 돌파구(significant opening)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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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7월 19일 2차 북·미 고위급 회담 합의 후 미국 측의 반응이 담긴 외교문서. 외교부. 밑줄은 기자가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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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北 전적 거짓말…지연 전술"



그러나 미국의 이런 낙관적 전망에 한국 정부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시간을 끌려는 "북한의 지연 전술 책동일 수 있다"(당시 주미 한국 대사관 참사관)는 것이다. 북한은 실제 NPT 잔류와 IAEA 특별사찰 수용의 반대급부로 미국으로부터 핵무기 등 무력 불사용 법적 보장을 포함한 평화 협정 체결, 외교 관계 완전 정상화, 남북한 균형 정책 약속 등을 받아내려 했다. 이는 같은 해 10월 방북한 개리 애커먼 당시 미국 하원 외무위 동아태 소위원장을 수행했던 케네스 퀴노네스 당시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에게 김계관 외교부 순회대사(후일 6자회담 수석대표)가 전달한 메모에 나와 있다.

이런 북한의 제안을 들은 한국 측은 우려를 표했다. 애커먼 소위원장은 방북 이후 방한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일성의 발언을 전했다. "북한에는 핵무기가 없고, 핵무기를 제조할 이유와 능력 그리고 돈도 없다"는 취지였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라며 "위성 촬영 등 여러 정보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옐친, KAL기 블랙박스 제공 번복



이날 공개된 외교 문서에는 정부가 1983년 대한항공(KAL) 여객기 격추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블랙박스 원본을 확보하려 노력한 정황도 담겼다.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1992년 11월 방한을 3개월 앞두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전화해 KAL기 블랙박스를 포함한 사건 자료를 공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면서 러시아 측은 일방적으로 모스크바로 특사 파견을 요청했는데, 당시 정부는 이미 러시아가 미국과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걸 눈치챘다. 미국은 사고 초기부터 블랙박스 등 핵심 자료를 공유 받고,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서 검증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정부는 사건의 "1차적인 당사국"인 한국에 자료를 먼저 주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미국에 넘겨야 한다고 러시아에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KAL기 추락 당시 승객 총 240명 중 한국인이 81명이었으며 외국인 중에선 미국 국적이 56명으로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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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김포공항 임시보관소에 보관중인 대한항공 여객기의 잔해들. 중앙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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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1월 옐친 대통령 방한 시 블랙박스가 한국에 전달됐지만, 진상 규명의 핵심인 비행경로기록(FDR) 테이프는 아예 없었고 조종석음성녹음(CVR) 테이프도 원본이 아닌 사본이었다. 결국 한국, 러시아, 미국, 일본은 그해 12월 모스크바에서 만나 ICAO에 재조사를 요청하기로 하면서 블랙박스 원본을 ICAO에 넘겨 해독하는 데 합의했다. 실제 한국 정부가 블랙박스 원본을 확보한 건 ICAO 조사가 다 끝난 뒤인 이듬해 7월이었다.



전두환 "난동 부리면 민주 인사냐"



한편 이날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직후인 1988년 4월 미국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CFR) 행사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질문을 받고 "무장 세력의 난동"이라는 취지로 답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는 "광주 사태는 근세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대단히 유감스러운 사건"이라며 "많은 외국 언론이 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뉴욕에서 무기와 수류탄을 가진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난동을 벌일 때 미국 경찰은 그런 사람을 민주 인사로 볼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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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퇴임 직후 미국을 방문해 가진 연설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질문을 받고 '무장 세력의 난동'이라는 취지로 답변한 것으로 외교문서에 나타났다. 외교부. 밑줄은 기자가 표시.



이밖에도 1993년 개최된 대전세계박람회(대전엑스포) 조직위원회가 북한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단계별 계획’을 짰던 내용도 이번에 공개된 외교 문서에 담겼다. 전체 문서는 2306권, 37만여 쪽에 달하며,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볼 수 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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