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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백석의 삶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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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나는 백석이다’ 펴낸 이동순

“백석 시인의 영혼에 빙의되어

그의 말씀 대필하며 옮겨 적어”

만주 유랑 시절 등 담담히 묘사

“회고하는 방식으로 실감 강화

직접 화법으로 용감하게 집필

北서 숙청 뒤 겪은 어려움 집중”

앞으로 한국의 인물을 500명 정도 선정해 시리즈로 낼 계획인데, 작가님께서 시리즈의 선두에서 백석을 다룬 책을 한 권 내시면 어떻겠습니까. 지난해 늦봄 출판사 대표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더구나 긴 글이 아니라 원고지 500매 정도라고 했다. 백석 시인이라, 백석 시인…. 그가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 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시 전집을 펴냄으로써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자리 잡은 시인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74년, 스물네 살의 대학원생 이동순은 거의 매일 대학원 동기생 두 명과 함께 대구시청 앞에 위치한 고서점 거리를 순례했다. 그는 주로 문학, 특히 오래된 시집을 찾았다. 수업 시간에 배우지 못한 시인들의 이름이 쏟아졌다. 대개가 북으로 간 시인들이었다. 이때 ‘현대조선문학전집’을 보게 됐고, 여기에서 시인 백석을 만났다. 백석의 시를 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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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작가가 시인 백석의 일대기를 1인칭 시점으로 그린 책을 펴냈다. 이 시인은 책머리에서 “어떤 측면에서 나는 백석 시인의 영혼에 빙의가 되어 당신의 말씀을 단지 열심히 대필하며 옮겨 적었다”고 말했다. 이제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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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주변에 오해를 많이 샀습니다. 너는 사상이 붉은 쪽이냐, 왜 북으로 간 시인들의 시에 관심을 갖고 자꾸 모으느냐. 선배들은 말하더라고요. 조금 수상한데. 불편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아는 후배들에게 책을 빌려주다가 그다음부턴 딱 끊어 버렸죠.”

흰 ‘백(白)’ 자가 들어간 시는 무조건 찾았다. 백석(白石)의 시도 나왔지만 백철이나 백신애 등의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실망의 연속. 그럼에도 언젠가 백석 시 전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를 모으고 모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백석의 시를 한 편 두 편 보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거의 100편쯤 모이자, 그는 1987년 10월 ‘백석시전집’을 출간했다.

책은 장안에 화제를 낳으며 불티나게 팔렸고, 백석 시를 재평가하는 글이나 논문 역시 쏟아졌다. 백석은 일약 한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부상했다. 이후 젊은 백석과 한때 사랑을 나눴던 ‘자야’ 김영한 여사와 연결되면서 젊은 백석의 러브 스토리를 밝혀냈고, 안도현 작가가 ‘백석 평전’을 집필할 때도 서로 만나 깊이 논의했다.

진즉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런저런 연구와 다른 책을 내느라고 시작하지 못했던 그는 마침내 백석 일대기를 쓰기로 했다. ‘왈칵’ 써내려갔다. “나 백석은 1912년에 태어났다. 임자생, 본명은 백기행이다. 쥐띠다. 그해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11년 전의 일이다.”

중견 시인 이동순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백석의 일대기를 1인칭 시점으로 조명한 책 ‘나는 백석이다’(일송북·사진)를 최근 펴냈다. 시인은 책머리에서 “어떤 측면에서 나는 백석 시인의 영혼에 빙의가 되어 당신의 말씀을 단지 열심히 대필하며 옮겨 적었을 뿐”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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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백석이 고향인 평안도 정주에서 가졌던 꿈, 일제하 서울에서 공부와 글쓰기, 신춘문예 단편소설을 통한 등단과 일본 유학, 시인으로 선회, 첫 시집 ‘사슴’의 발표와 문단의 평가 등을 차례로 담았다. 기생 ‘자야’와 은밀하게 펼쳐진 러브 스토리도.

“나는 돌연히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려서 그 기생의 손등을 슬며시 포개어 잡았다. 기생은 움찔하며 당황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몹시 놀라는 그런 기색을 차마 나타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앉은 채로 상체를 기생 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얼굴은 마치 시치미를 떼듯 맞은편을 향해 보면서 소곤거리는 말투로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니 그리 알아요.’ 너무도 느닷없는 돌출 발언에 놀라 기생의 얼굴에는 한순간 홍조가 서렸다.”

책은 이어서 만주 유랑 시절 느낀 허탈감, 해방된 고향과 북한 문단과의 불화, 삼수갑산 관평리 협동조합에 유배된 분노와 회한 등 알려지지 않은 백석 이야기도 담담하게 그려 나간다.

“나는 해발 800미터의 가파른 관평리 언덕길에서 그저 처연하고 볼품없는 늙은이로 시들어 갔다. 회갑을 지나고 고희도 훌쩍 지나 등도 굽고 허리도 구부정한 팔순 노인의 모습이었다. 나는 관평리의 그 언덕길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가다가 쉬곤 하면서 터벅터벅 걸어 다녔다. 자, 내 고백을 들은 한국 독자 여러분의 느낌은 어떠하신가. 독자 여러분께서 내 말년의 이런 정경을 생각하신다면 참으로 가슴이 따갑고 명치끝이 아려 오실 것이다.”

시인 백석을 대중적으로 부활시킨 ‘백석 전문가’ 이동순이 바라본 백석은 어떤 모습일까. 그가 쓴 백석 일대기는 이전 평전과 어떻게 다를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이 작가를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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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기 집필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어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왈칵 썼다. 시인을 생각하면 감회가 많은데, 이번 책을 내면서 시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 제 나름대로 해석을 다 쏟아내고 나니 후련한 생각이 들고 마음의 빚도 어느 정도 갚은 것 같아 흐뭇하다.”

―기존 평전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쉽게 풀어쓴 백석의 일대기, 백석이 주인공으로 나온 회고록 같은 일대기에서 차별성이 있다. 시인 자신이 지난 세월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실감을 강화하는 화법을 썼다. 사실 직접 화법을 쓰려면 굉장히 용감해야 한다. 시인에 푹 빠져 온 지가 수십 년이니까 제 속에 육화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시인의 어떤 퍼스널리티를 대신해 이야기할 만한 자신이 있었다.”

―내용적 차별성이나 특징이 있다면.

“시인이 북에서 숙청당해 해발 800m의 관평리 산중에 있을 때 그 마음의 황폐함이나 자녀들로부터 받은 심정적 고통은 기존 평전에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이번에 포커스를 둬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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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인데, 그의 연애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대상은 ‘자야’인가.

“백석이 연인 자야를 그린 가장 확실한 시는 ‘바다’다. 자야 할머니 말로는, 함흥 시절 한번은 싸우고 난 뒤 서로 서먹서먹했다더라. 읽어 봐. 백석이 시 ‘바다’가 실린 잡지를 툭 하고 방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당신이 들어 있는 시가 발표됐어. 자야는 토라져 안 보는 시늉을 하다가 나중에 시를 읽고 감동해 눈물을 쏟았다고 하더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경우, 자야 할머니는 자기를 노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 말고 누구를 생각했겠어? 물론 자야가 아니라 통영의 박경련이라거나 제3의 인물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950년 김천에서 농사짓던 이현경과 김기봉 부부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동순은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왕의 잠’이 당선돼 등단했다. 198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에도 당선됐다. 등단 이후 ‘개밥풀’ 등 시집 스물두 권을 펴냈다. 2003년에는 10권짜리 서사시 ‘홍범도’를 발간했다. 김삿갓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인은 흰머리를 휘날리며 이야기를 조곤조곤, 리드미컬하게 들려준다. 그의 말은 부드럽고도 친절해 머릿속에선 마치 손에 잡힐 듯 상상의 그림이 펼쳐진다. 그리하여 어느새 ‘경성의 모던 보이’ 백석의 옆에서 그를 비스듬하게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 고흐의 보리밭 머리를 한 큰 키의 백석은 눈이 펄펄 내리고 있는 경성의 어느 주점에 홀로 앉아 고조곤히 소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서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주점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그의 눈길이 문쪽 백열등에 닿는 순간 무엇인가 번쩍이는 게 보였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부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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