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나라 고대사를 바꿀만한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며 급하게 기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나온 고리자루큰칼 세 자루 가운데 두 자루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글자가 발견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지왕'(爾斯智王) 박물관 측은 애초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최초의 왕명이라고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부랴부랴 브리핑을 들으러 갔습니다.
취재진 가운데에서도 제일 먼저 도착해 칼이 잘 보일 것 같은 위치를 잡아 앉았습니다.
대단한 발견이었다는 기대에 취재진도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고, 드디어 다 이으면 85cm 정도 될 네 동강이 난 칼이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겉 장식은 모두 부식이 됐고, 서걱서걱한 나무 칼집이 남아 있는 칼은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검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이의 금속판에 써 있는 글자는 돋보기로 들여다봐야 보일 정도로 희미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 글자는 조선총독부 시절 발굴됐던 유물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동안 심하게 부식이 되어 있어서 엑스레이로도 보이지 않았는데, 연구사들이 수술용 칼로 한 겹 한 겹 부식층을 벗겨내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누구였을까.
사실 '이사지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심지어 신라 금석문에서도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이름입니다.
당시 신라의 최고 지배자였던 내물, 실성, 눌지, 자비, 소지, 지증왕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누가 감히 '왕'이라는 명칭을 썼을까요.
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 건립)를 보면 '차칠왕등'이라는 문구가 써있습니다.
'차칠왕등'은 마립간이 아니었는데도 '왕'으로 불렸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마치 몽골에서 최고 지배자인 '타이칸' 밑에 2인자들인 '칸'들을 둔 것 처럼 말입니다.
법흥왕 때에 이르러서야 '킹'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왕'의 호칭을 쓸 수 없게 됐습니다.
그 이전에는 최고위 귀족들은 '왕'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결국 이번 '왕' 글자 발견은 금관총이 만들어졌던 6세기 이전에도 귀족들에게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발견된 게 의미라면 의미이겠습니다.
그럼 금관총의 주인은 밝혀진 걸까요? '이사지왕'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것마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그동안 금관총은 '여성'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었습니다.
부장된 시신에 금관이 씌워져 있었고, 귀걸이로 장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관총에서는 이번에 명문이 발견된 고리자루큰칼 크기의 칼이 세 자루가 발견이 됐습니다.
그런데 세 자루 모두 시신에 착장이 된 채 묻혀 있던 게 아니라, 다른 부장품과 함께 바깥쪽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무덤의 주인이 꼭 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칼에 써있는 '이사지왕'과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이 더 큰 것이지요.
결국 박물관이 처음 발표한대로 '신라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첫 사례'도 아닌거고,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최초의 왕명'도 아닌 겁니다.
박물관 측도 보도자료가 '부풀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앞으로도 연구를 더 진행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다만 야심차게 시작한 '조선총독부 박물관 자료 공개 사업'에서 첫 번째 성과가 나왔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용두사미가 되어 버린 브리핑이었지만, 임신을 한 상태에서도 부식층을 한꺼풀씩 벗겨내 처음으로 금관총 대도 글씨의 비밀을 알아낸 학예연구사의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열정이라면 그동안 묻혀있던 일제시대 유물들의 새로운 비밀도 곧 속속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는 되지만, '낚시성 보도자료'는 제발 뿌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권란 기자 harash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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