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골라 출신 난민 신청자 루렌도 은쿠카(왼쪽)와 가족들은 최근 난민 심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송주원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어 능숙해진 4남매…공항 생활 후유증 여전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9월 27일은 앙골라 출신 난민 신청 가정인 루렌도 가족에게 특별한 날이다.
지난해 같은날 루렌도 은쿠카 가족은 인천공항 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낸 '난민 인정 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고 승소했다. 이 판결로 난민 인정 심사를 받을 수 있게 된 루렌도 가족은 287일간의 공항 노숙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입국했다. 이날은 루렌도 가족의 막내 그라샤(8)의 생일이기도 했다.
◆한국서 첫 생일이지만 공항 생활 후유증 여전
항소심 판결 뒤 꼭 1년이 흐른 지난 27일 아침 경기 안산 루렌도 가족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일요일 아침이지만 루렌도 부부는 그라샤의 생일파티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라샤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파란색 풍선이 벽과 천장 곳곳에 달려 있었다. 이날의 주인공인 그라샤와 레마(11), 로데(10·쌍둥이), 실로(10·쌍둥이) 4남매도 TV가 보고 싶어 일찍 일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한국어를 곧잘 배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부부와 아이들의 표정 모두 밝고 활기가 넘쳤다.
은쿠카(48), 보베테(41) 부부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우리 부부는 인근 마트에 외출해 외식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 확산 전까지는 주일에 교회도 다녔다"며 "이런 작은 자유와 일상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말했다. 공항 상점에 파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루렌도 부부의 '소울 푸드'는 뼈해장국과 감자탕이 됐다. 크리스천인 부부가 교회에 갈 때마다 따스하게 맞아 주는 이웃들도 큰 즐거움이다.
루렌도 가족은 2018년 12월 콩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앙골라 현지에서 박해에 시달리다 한국에 관광비자로 입국했다. 난민인정심사를 요청했지만, 한국 법무부는 난민으로 인정할 명백한 사유가 없다며 심사의 기회마저 박탈했다. 그렇게 루렌도 부부는 4명의 아이들과 인천공항 46번 게이트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라운지에서 소파 6개를 이어 붙여 숙식을 해결했다. 24시간 돌아가는 공항의 밝은 불빛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루렌도 가족의 사연을 듣고 팔을 걷어 붙인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법무부 결정에 불복하는 행정소송을 냈다. 하지만 1심 법원 역시 법무부의 손을 들어주며 가족들의 힘겨운 공항 생활은 계속됐다. 한창 학교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고 공부할 나이의 아이들도 공항 소파 위에서 엄마와 가정학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9월말 서울고법이 루렌도 가족의 손을 들어주며, 한국에 온지 10개월 만에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처음 한 달은 구세군 이주민 쉼터에서 지냈고 이후 안산에 정착했다. 한국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지만 공항 생활 후유증은 부부는 물론 아이들에게도 남았다. 이날 오후에도 병원 예약이 잡혀 있던 은쿠카는 아픈 몸보다 아이들이 더 걱정이다. 루렌도 가족을 향한 일부 공항 직원들의 호통은 아이들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은쿠카는 "아이들이 공항에서 잠도 못자고 힘들게 생활했던 기억 때문에 지금도 우울함과 불안감이 심해 상담을 받고 있다"며 "쌍둥이 중 실로가 특히 힘들어 해 마음이 아프다"고 토로했다.
루렌도 은쿠카 부부(사진)는 올해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송주원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다음 연휴엔 돈 벌어 63빌딩 가고 싶어요"
한국에서 첫 추석 연휴를 앞둔 아이들의 소원은 63빌딩에 가는 것이다. 하지만 부부는 내년 연휴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상황에 4남매를 데리고 외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현행법상 난민 신청자는 신청일로부터 6개월 뒤 취업이 가능하다. 은쿠카도 지난 7월 취업 제한 기간이 끝나면서 일자리를 찾아 나섰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국이 겹쳐 취업이 쉽지 않았다. 은쿠카는 "7월부터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취업이 매우 어려워졌다. 돈만 벌면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는 63빌딩부터 갈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취학하며 아내 보베테도 취업 전선에 뛰어 들었지만 상황은 더 여의치 않았다. 보베테는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노 아프리카 우먼'(No Africa women)이라고 하더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생계 걱정에 막막하지만 부부는 하루하루 커 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힘을 낸다. 1학기를 끝낸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꺼내 보며 부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4남매의 성적표 수학 과목란에는 하나같이 '매우 잘함'이 적혀 있었다. 보베테는 "제가 어릴 때 수학을 잘 했다. 아이들이 날 닮았다"며 웃어 보였다.
쌍둥이 남매 실로와 로데는 국어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특히 동물을 좋아하는 실로는 동물 그리기 숙제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동물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실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네. 강아지를 제일 좋아해요. 너무 귀여워요"라고 말했다. 그런 실로를 바라보던 아빠 은쿠카는 "다음 연휴에는 실로에게 63빌딩 아쿠아리움을 구경시켜주고 싶다"고 했다.
루렌도 가족은 2018년 12월 한국에 왔지만 법무부의 난민 심사 불회부 결정으로 약 300일간 인천공항 환승구역에서 생활해야 했다. /송주원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 같은 선진국에서 왜?" UN도 루렌도 가족에 관심
루렌도 가족은 지난 7월 난민 심사를 모두 마쳤다. 은쿠카는 "면접 분위기가 좋았다"며 심사 결과에 기대를 내비쳤다.
루렌도 가족은 난민 심사를 받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 난민법은 난민 심사에 앞서 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부터 따진다. 루렌도 가족은 이 절차부터 난항을 겪었다. 법무부는 루렌도 가족을 난민으로 인정할 명백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 항소심 재판부는 이같은 법무부의 결정에 오류가 있었다고 지적하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 과정에서 루렌도 가족이 처한 상황에 대한 법무부의 조사가 미흡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행정소송 1심 재판에서 법무부는 루렌도 가족이 앙골라에 거주할 당시 살았던 집 주인이 "루렌도 가족은 계획적으로 한국행을 준비했다"고 말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루렌도 가족의 변호인단이 따로 조사한 결과 집 주인은 "루렌도 가족이 어느 날 열쇠를 반납하고 방을 뺐다"는 내용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 측은 "집주인의 진술이 번복돼 저희도 의아하다"며 오류를 사실상 인정했다.
법무부의 미흡한 조사는 여전히 도돌이표다. 28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0단독 재판부는 종교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 중동 출신의 난민 신청자가 법무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의 신청서만 살펴봐도 박해 경험을 쉽게 알 수 있는데 법무부는 전혀 조사하지 않은 채 체류 자격을 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신청자 역시 "본국에 돌아가면 사형 당한다"며 난민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렌도 가족 사건을 계기로 한국 난민 심사제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난민 심사를 규정한 난민법이 제일 먼저 도마에 올랐다. 루렌도 가족의 변호인단은 행정소송 항소심 재판 중 난민법 제6조 5항 '출입국항에서 하는 난민인정 신청의 절차 등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조항을 두고 위헌심판제청을 청구했다. 난민 심사 절차와 필요한 자료 등을 법령에서 서술하지 않아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지적이다.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헌법재판소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난민 아동 인권 보호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UN 아동권리위원회는 지난해 "한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어떻게 10세 미만 아동이 조용히 잠잘 수도 없는 공항에 갇힌 상황이 발생했는지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아동 최선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입국이 가능하도록 관련 법령 및 제도를 개선하라"고 법무부에 의견을 표명했다. 인권위에서 난민 아동에 관한 의견이 나온 건 처음이다.
ilraoh@tf.co.kr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