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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수)

[문화의 창] 봉준호와 방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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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예술을 한다는 힘

세계의 경험도 우리의 자산

전통의 획득도 우리의 자산

장르의 복합은 비빔밥 같아

중앙일보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코로나19로 나라가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이 시점에 문화의 창으로 세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한가로워 미안한 마음 없지 않은데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온 세계가 난리인 것을 보면 역시 지구촌은 한 식구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직전,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하는 기쁨에 젖어 있었다. 이 엄청난 성취에는 아무리 박수를 보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방시혁의 BTS도 마찬가지였다. K팝의 세계적 반향은 실로 놀라운 뿐이다. 좋은 예가 있다. 요즘 우리나라 BBC 채널에서는 작년 여름에 방영한 여배우 조안나 럼니의 ‘실크로드 탐사’ 시리즈를 재방송하고 있다. 조안나의 실크로드 탐사는 베니스에서 출발, 지중해를 지나 이스탄불- 아나톨리아 반도- 조지아- 이란을 거쳐 키르키스탄의 이식쿨 호수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이식쿨호수에서 조안나는 여기가 중세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흑사병의 발생지라며 실크로드가 꼭 좋은 것만을 가져온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국경도시에 와서 천산산맥을 가리키며 저 산 너머가 중국인데 중국 정부로부터 촬영허가를 얻지 못해 탐사 프로그램을 마치게 됐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리고는 시내로 들어왔는데 한 무리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춤을 추자 조안나는 화풀이라도 하듯 멋진 스카프를 날리며 이들을 따라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춤판이 끝나고 나서 젊은 아이들에게 이 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큰 목소리로 “K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류가 여기까지 흘러간 것이었다.

나는 우리 영화와 음악의 이러한 세계적 성취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말할 수 없는 자랑과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 생을 문화계에 몸담고 살아온 나로서는 낭패감 같은 게 없지 않음을 숨길 수 없다. 나는 이제까지 문화활동을 하면서 건방지게 말해서 ‘민족주의’의 기조 하에 사고하고 행동했다. 나의 세대에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를 갖고 자기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봉준호와 방시혁은 그런 것을 훌쩍 넘어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마틴 스콜세지가 말한 ‘가장 개인적(personal)인 것이 가장 창의적(creative)이다’라는 것을 예술 신조로 삼았다고 했다. 봉준호는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했을 뿐이고, 방시혁은 좋은 노래를 만들려고 했을 뿐이다. 자기가 좋다고 생각한 것을 자신있게 밀고 나갔고 그것이 성공한 것이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본인들은 의식한 일도 없겠지만 우리 세대는 자신의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사조를 열심히 익히면서 서양의 신사조에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경험의 축적이 많은 장르의 체험이라는 자산이 되었다. 나는 BTS와 K팝 동영상을 보면서 공부해 보았다. BTS 노래 중 ‘작은 것들을 위한 시’ 정도만 그럴 듯했고 다른 곡은 끝까지 듣기도 힘들었으니 확실히 공부한 것이다.

그런 중 유럽의 한 음악평론가가 이렇게 분석한 게 있었다. K팝은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의 뛰어난 음식인 비빔밥 같은 음악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신선한 재료를 맛있는 소스를 넣고 비벼서 영양가도 있고 맛도 있단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K팝은 한 가지 장르가 아니라 EDM(Electronic Dance Music)을 바탕으로 해 팝, 힙합, 발라드, 리듬 앤 블루스 등 여러 요소가 잘 어울린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런 장르의 복합은 서태지와 아이들 때 먼저 나타났는데 그때는 SNS가 발달하지 않아서 한국 내에만 머물었는데 2002월드컵 축구 때 붉은 악마들의 응원에서 보여준 떼창의 힘이 여기에 더하면서 BTS 같은 음악이 나온 것이라고 했다.

특히 BTS의 노래에는 퇴폐적이거나 감각적인 유흥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과 용기를 담고 있어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공통된 고통을 받고 있는 세계 젊은이들에게 큰 공감을 얻고 있는데 이 점은 비틀즈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내가 판단하건데 봉준호와 방시혁의 예술창작 행위에서 중요한 점은 ‘그냥’ 좋은 영화를 만들었고, ‘그냥’ 좋은 노래를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자신감을 얻기 위해 지난 50년간, 아니 1백년간 우리는 얼마나 고민하고 노력해 왔던가. 앞 시대의 민족주의는 그들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중요한 문화적 DNA로 그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봉준호와 방시혁의 예술적 성취의 바탕에는 이런 문화적 축적이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가 우리 기준대로 방역체계를 갖고 밀고 나아가 이런 정도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또한 문화적 자신감이 아니면 행하기 힘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생각한 대로 행하는 것이 곧 세계적인 것으로 통할 수 있는 문화능력을 갖고 있다. 이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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