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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비대면 상품을 은행원이 도와 개설? 얼굴 보며 하는 비대면 거래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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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조선일보

일러스트=안병현


“휴대폰 잠깐 주시겠어요?”

창구 너머 은행원이 말했다. 지난달 15일 새해맞이 적금을 들러 온 3년 차 직장인 정모(27)씨는 순순히 휴대폰을 건넸다. "앱 로그인 한번 부탁해요." 은행원이 상품 설명을 하며 정씨의 휴대폰을 한참 들여다봤다. "가입됐습니다. 펀드도 좋은 거 있는데 해드릴까요?"

이날 정씨가 가입한 상품은 온라인에서만 신청할 수 있는 '비대면(非對面)' 상품. 구태여 은행까지 가서 창구 직원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은행 적금 중 금리(최고 2.25%)가 가장 높다.

정씨는 "혼자서도 인터넷으로 약관을 보며 가입할 수 있지만 이율·조건 등 방대한 정보를 처리할 만한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은행 문 닫기 전에 지점까지 가야 하는 불편은 감수할 수 있다. 그는 "공인 인증서와 은행 앱이랑 씨름하다 보면 30분은 걸린다"며 "은행원이 처리해주는 편이 에너지가 덜 든다"고 덧붙였다.

비대면 방식은 누군가에게는 매뉴얼 없이 도착한 조립식 책장처럼 막막한 존재다. 이쪽으로 끼워 보고 저쪽으로 돌려 보고 뒤집어 봐도 답을 찾지 못한다. 정씨가 그랬듯 노년층만의 문제도 아니다. SM C&C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비대면 거래에 대한 설문조사를 의뢰했다. 지난 26일 20~60대 5019명이 '비대면'으로 답했다.

대면하고 '비대면 거래'?

비대면 방식은 키오스크(무인 주문기), 사물인터넷 등 기술 발전으로 한국 사회의 대세가 되고 있다. 응답자의 63%가 '비대면 방식으로 은행·증권 계좌를 개설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아직은 낯선 존재다. '대면 거래가 비대면 거래보다 좋다'는 응답은 전체의 43%. 이들 가운데 46%는 그 이유를 '대면 거래가 익숙해서'라고 답했다.

비대면 거래는 '돈과 시간을 아낄 수 있다'고 유혹한다. 비대면 거래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복수 응답 가능)는 '창구에 직접 가지 않아서'(70%)였다. 30·40·50대 응답자의 40%는 비대면 거래가 '이율·수수료 등이 유리'해 선호했다.

남모(32)씨도 3년 전 그 유혹에 끌려 비대면 주식 계좌 개설에 도전했다. 거래 수수료가 10년간 무료라고 했다. 그는 반나절 앱과 사투를 벌이다 절망했다. "저 비대면으로 계좌 만들려고 하거든요. 잘 안 되는데 어떻게 하죠?" 정장을 입은 증권사 직원이 남씨 집 근처 카페로 찾아왔다. 증권사 지점에서처럼 직원을 '대면'해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대면 계좌'를 열 수 있었다. 비대면 계좌 개설도 은행·증권사 직원들의 실적이다.

"창피하니까 이름은 싣지 마세요."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선후(가명·25)씨가 말했다. 은행 영업시간에 갈 수 없어 비대면으로 계좌 개설을 시도한 그에게도 비대면 거래는 너무 어려웠다. 고객센터 상담원에게 1시간가량 전화 강습을 받아야 했다. 대면 거래를 선호한 응답자(복수 응답 가능)의 17%는 '앱·모바일 거래가 어려워서'를 그 이유로 꼽았다. 20대(18%)와 30대(20%) 등 젊은 층도 비대면이 버겁기는 매한가지였다.

키오스크 앞에서 창피했던 적 있나요

권용한(25)씨는 지난해 7월 대구 동성로 PC방에 오랜만에 들렀다 굴욕감을 맛봤다. "키오스크에서 자리표 뽑고 오셔야 해요." 직원 말에 난생처음 보는 키오스크 앞에 섰다. 빈자리만 표시된 화면을 바라보며 어떻게 자리표를 뽑아야 하는지 몰라 10분 넘게 서 있었다. 직원이 한숨을 쉬었다. "여기 버튼 먼저 누르시고 자리 선택하시면 됩니다." 권씨는 "10분 동안 그 앞에서 별짓을 다 해도 안 되는데, 너무 창피하고 화가 났다. 그 뒤로는 PC방을 안 간다"고 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키오스크가 어려워 도움을 받아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렇다'가 38%였다. 20대의 26%, 30대의 31%, 60대의 51%가 직원 도움을 받아 키오스크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접촉(contact)하지 않는다는 뜻의 ‘언택트(un-tact) 마케팅’은 2018년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꼽은 10대 소비 트렌드 중 하나. 대면하기 부담스러우니 ‘편한 단절’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직원을 상대하기 불편’해 비대면 거래가 좋다는 응답은 20대가 25%, 30대가 23%였다. 전체 평균(22%)에 가까웠다. 반면 대면 거래를 선호하는 20대와 30대의 40%는 ‘직원과 하는 거래를 더 신뢰할 수 있어서’를 이유로 골랐다. 얼굴 맞대고 눈 맞추는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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