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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아빠 실버타운 입소? 내가 잘 모신다면 15억 자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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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14)



“이것 봐라, 오늘 하루 병원비가 50만원이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병원비를 써서 되겠냐?” 아버지 휴대폰에 전송된 카드 결제 문자를 열어본다. 건강검진 이후 추가 진료 과정에서 CT 촬영도 하고 여러 검사를 받긴 했는데, 설마 그 정도로 나올 줄이야. “CT 촬영 23만9100원, 혈액 등 추가 검사비 12만6600원, 총액 36만5700원.” 아버지 걱정만큼 액수가 부풀려졌다.

“아빠, 건강을 위한 것인데, 아까워하시면 어떻게 해요. 의사가 필요하다 해서 한 검사에요. 아버지 돈은 아버지가 다 편안하게 쓰셔도 돼요.” 아버지는 네 돈 내 돈이 어디 있느냐며 무조건 아껴야 한다를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아버지와 나, 둘 다 신변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지금 생활 수준을 유지할 정도는 된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껴라, 절약해라”를 입에 달고 사신다. 조금이라도 남겨 딸들 가정에 보태고픈 마음, 훗날 홀로 남을 막내딸 걱정해 그러시는 줄 알면서도 안타까울 때가 많다. 물론 열심히 아끼고 많이 벌어 이웃과 베풀고 나누고 살면 더 좋겠지만, 비혼인 나로선 설마 내 몸 하나 책임지지 못하겠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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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국민연금으로 본인 용돈을 쓰신다. 네 딸들 교육 다 시키고 결혼시킨 지금은 큰 돈 들 일은 없으니 낭비하지 않으면 생활할 수 있다. [사진 px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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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주 수입원은 국민연금이다. 55세 퇴직하시고 현재까지 받은 금액이 재직시절 적립한 돈의 10배가 넘는다. 좋은 제도이고 엄청난 혜택이다. 다행히 안심하고 살 곳이 있고 큰돈들 일없으니 본인 용돈 정도는 쓰실 수 있다. 네 딸 교육시키고 결혼시킬 때는 한 푼이 아쉬웠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낭비하지 않는다면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도 걱정 또 걱정이시다.

물론 눈을 높이면 끝이 없다. 지난해 중앙일보 주최 ‘더 오래 콘서트’에서 뵙게 된 어느 분은 아버지와 둘이 사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실버타운이나 실버주택 입주를 권해 주셨다. 나는 연세가 더 드시고 혼자 사셔야 할 때 그러한 곳을 찾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버지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고 젊으실 때 입주해 적응하시는 게 좋다는 조언이었다.

시설 좋고 교통도 좋아 인기 있다는 곳을 알아보았다. 입소 보증금만 8억이 넘고 기본 관리비가 가구당 100만 원 이상, 식대 등 2인 생활비를 더하니 한 달에 400만~500만원은 족히 필요했다. 10년 이상 지낼 것이라 보면, 보증금 빼고 현금 6억~7억 원은 있어야 한다. 비용이 많이 드는 만큼 주거와 커뮤니티, 문화, 체육시설을 갖추고 의료·재활 시설도 있어 장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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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타운 비용을 들이지 않고 우리집에서 아버지가 즐겁고 건강하게 사실 수 있다면 그만큼 버는 셈 아닌가. 내가 계속 아버지를 잘 모신다면 적어도 15억 자산가가 되는 셈이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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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혼자 밥 먹기를 힘들어하는 아버지에게는 적격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하는 저녁과 혼자인 점심의 식사량이 확연히 차이 난다. 날씨가 춥거나 궂은 때는 외출이 힘드셔서 저녁에 들어가면 “네가 오니 이제 내가 입을 떼어본다” 하신다. 문화센터나 복지관 같은 곳은 복잡해서 싫다 하시고 거실 지정석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바둑TV와 ‘나는 자연인이다’와 더불어 고독을 즐긴다.

보증금도 만만치 않지만 돌려받을 전세금이라 생각하면, 생활비 면에서만 아버지가 납득한다면 실버타운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용기 내어 문의해 보니 혼자 또는 부부 입소 위주라 연령 제한이 있고, 입소자와 동성이 아닌 자녀의 경우에도 제약이 있었다. 보증금 8억 원, 1년 생활비 5000만 원으로 10년을 산다 했을 때 합 13억 원. 계산기 두드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돈 들이지 않고 우리 집에서 즐겁고 건강하게 사실 수 있다면 그만큼 버는 셈 아닌가. 내가 계속 잘 모신다면 적어도 15억 자산가가 되는 셈이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도 큰 비용 드는 실버타운보다는 우리끼리 오순도순 잘 사는 것일 터. 실버타운에서 매달 지출해야 할 비용을 아끼는 재미로라도 위로 삼아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달부터 가계부를 고급 실버타운에 살 경우 나갈 지출에서 실제 생활비를 빼는 방식으로 정산해 보려 한다. 보나 마나 식비와 공과금 다 빼고도 월 200만 원 이상 흑자일 것이다. 바꿔 생각하면 아버지와 함께한 지난 10년, 나는 매년 2500만 원씩 총 2억 5000만 원을 아끼거나 번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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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시는 약이 늘어나면서 한달에 한번씩 우리 집 식탁이 작은 약국이 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분류해 재포장하는데, 아침식사 후 드시는 약은 자그마치 7종이다. [사진 푸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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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실버타운만큼 좋은 식단과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가 묻는다면 “예스”라 답할 자신은 없다. 운동과 여가, 커뮤니티 프로그램까지 갖춘 곳을 따라잡기란 어지간한 실력과 노력으론 힘들 것이다. 이 역시 내 역량 안에서 대체 방안을 모색해 본다. 잔소리만 줄여도, 가끔 주체하지 못하고 발산하는 신경질만 자제해도,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을 조금만 더 늘려도 지금보다 대폭 개선된 프로그램이 아닐까.

나는 일류 실버타운 운영자, 아버지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입소한 고객님. 이 ‘최면’을 유지할 수 있다면 아버지 여생이 꽤 쾌적하고 평온해질 듯싶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훈훈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건강’에 대한 부분은 과제로 남는다. 아버지 건강검진 결과 대부분 주요 수치가 정기적인 검진과 약이 요구되는 수준이다. 이를 빠짐없이 발굴해 치료하며 절제된 생활을 하시도록 하는 게 최선인지, 어느 정도는 거르면서 심적 부담과 스트레스를 줄여드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정신건강에 더 좋을지 고민이다.

복용하는 약은 늘어만 가는 데 그 모든 것의 주범이라는 흡연은 고수하시는 아버지. 이번 주말에도 병원 순례가 예정되어 있고, MRI 검사비 35만3900원 지출이 예상된다.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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