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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중앙시평] 재난은 신뢰자본을 축적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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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각자도생의 한계 드러내

우리와 타인이 신뢰로 연결되면

일자리·안전·행복이 크게 증가

재난을 신뢰 쌓는 계기로 삼아야

중앙일보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시카고 공항에서 겪은 일이다. 새벽에 다른 공항에서 시카고로 와 귀국 편 비행기를 타기 위한 수속을 마쳤다. 그런데 게이트와 면세점으로 나가는 출구 문이 열리지 않았다. 출구 앞은 여권과 보안 검사를 마친 사람들로 이내 장사진을 이루었다. 속으로 ‘이게 미국의 문제야’라며 불평했다. 한참 후 방송이 나왔다. 열쇠를 갖고 있는 신입 직원이 늦잠을 잤으며 이제 오고 있다는 것이다. 10여분이 더 지나 드디어 출구 문이 열렸고 앳돼 보이는 청년이 나타났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출구 앞에서 기다렸던 사람들이 비난은커녕 박수로 격려했고 ‘괜찮아’라고 외쳤던 것이다. 청년은 감격스러워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필자도 어느 순간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게 선진국의 힘이야. 공동체의 품격이야’라면서.

그 청년은 자신의 실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사람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그도 다른 이의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람이 돼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용서가 교환되면 사람 사이 신뢰가 싹튼다. 신뢰는 개인적 위기에서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을 통해 형성될 수 있다. 순수한 실수와 고의적 악행을 잘 가려 전자는 포용하지만 후자는 엄격히 처벌하는 나라에선 사람과 제도에 대한 신뢰가 높다. 신뢰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동체를 안전하게 만들며 구성원의 행복을 증가시킨다. 이것이 신뢰를 ‘사회적 자본’이라 부르는 이유다.

사회적 재난도 신뢰에 영향을 미친다.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의 경우다. 지진 전후를 조사하니 지진 발생 지역의 사회적 자본은 증가한 반면 다른 지역은 그대로였다. 재난은 각자도생의 끝에서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과 연결된 존재인지 깨닫게 한다. 우리의 삶, 심지어 생명까지도 나 혼자선 지킬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이웃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다.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말씀이 왜 황금률인지 알게 된다.

경제학자들은 한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10% 포인트 증가하면 경제성장률이 0.8% 포인트 성장한다고 추정한다. 한국인의 신뢰수준이 현재의 26%에서 미국 수준인 35%로 상승한다면 작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가 아니라 2.7% 쯤 됐을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50조원 정도의 매우 큰 추경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와 비슷하다. 즉 지금보다 신뢰수준이 10% 포인트 증가한다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서도 5만개 가량의 일자리가 해마다 추가로 생긴다는 말이다.

신뢰는 거래비용을 줄여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키운다. 1990년대 중반 구(舊)사회주의 체제전환기에 폴란드 경제는 해마다 5% 가량 성장했던 반면 러시아는 5% 넘게 하락하고 있었다. 바로 신뢰 차이가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기업 경영자 대상의 설문조사에서 “낯선 사람이 지금 자재를 공급하는 사람보다 10% 낮은 가격으로 동일한 제품을 팔겠다고 하면 이를 받아들이겠느냐”고 물었다. 폴란드에선 43%의 경영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지만 러시아에선 그 비율이 불과 1%밖에 되지 않았다. 신뢰수준이 낮은 나라에선 낯선 사람을 의심한다. 그래서 서로에게 유익한 거래도 성사되기 힘들다. 계약을 위해 많은 서류를 요구하는 등 거래 비용도 높다.

신뢰는 사람 사이 유대감을 높여 공동체를 안전하게 만든다. 2011년 일본에 대형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사회적 자본이 높은 지역일수록 사망률이 낮았다. 서로 간 높은 유대관계가 재난을 빨리 알리고 대피를 도우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어떤 연구는 행복을 결정짓는 변수 중에 소득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신뢰임을 보여주고 있다. 정서적 만족감과 유대감이 돈보다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코로나19 재난은 우리 사회의 부족한 신뢰자본을 축적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아산·진천·이천에서 그랬듯 우한교민을 환영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이들이 14일간의 불안하고 외로운 격리를 견디는 데 힘이 됐을 것이다. 그 격려에 힘입어 회복한 이들은 공동체의 따스함을 마음에 품고 다른 사람들을 보듬을 것이다. 부지중 의도하지 않게 바이러스를 옮기게 된 감염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사실과 다른 데도 ‘활보’, ‘돌아다녔다’는 말로 분노를 자극하는 표현은 신뢰자본을 훼손할 뿐이다. 다른 사람도 자기와 같이 최선을 다해 감염이나 확산에 조심하고 타인을 배려할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할 때 우리 사회는 더욱 안전하고 행복해 질 수 있다. 그 믿음은 많은 일자리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무형의 공장이다.

고난 없이 맑아지는 영혼이 어디 있을까. 단련 없이 강해지는 심장이 있기나 할까. 재난은 우리 공동체의 영혼(가치)과 심장(역량)의 진단 키트다. 일자리, 안전, 행복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신뢰 축적의 기회다. 재난을 정치 도구로 삼으려는 꾼들이 득실거리면 사회는 무너진다. 발전하는 나라는 위기에서 신뢰를 담금질한다. 우리는 무너지고 있나, 아니면 공동체를 세우고 있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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