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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공감]공감불능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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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보다는 인공지능(AI)에 가까운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셜록 홈스. 최고의 두뇌와 달리 정서적 공감 능력은 제로다. 잔혹한 범죄 현장에서도 동요는커녕 감정은 문제 해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사건은 복잡할수록 흥미로운 게임일 뿐이다. 스스로 소시오패스 성향임을 인정은 하지만 다행히 인지적 공감능력은 있다. 일본 추리물의 대표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탐정 갈릴레오도 비슷하다. 괴짜 천재 물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비이성적인 것을 극히 싫어하는 인물이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도무지 논리가 통하지 않는 존재여서이다.

경향신문

소설, 드라마에서나 흥미롭고 매력적일 뿐, 현실에서 만나면 눈치도 인간미도 없어 꽤나 불편할 듯한 캐릭터들. 기질에 따라 범죄자거나 그 대척점의 탐정 정도로 이해되던 유형들이 최근 들어 다양하게 변형되며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상당한 마니아층을 확보했던 <비밀의 숲> 주인공은 수술이 잘못되어 공감능력을 상실한 검사다. 정서적인 흔들림이 없다 보니 이성은 더욱 날카롭고 어설픈 관계 논리나 무리 의식에 타협하지 않아 조직의 골칫거리다. 지난주 종영한 <스토브리그>의 주인공 역시 트라우마로 감정이 결빙된 초이성형 리더다. 아무에게도 무례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든 할 말은 한다. 당신의 믿음이 뭐냐는 질문에, “믿음으로 일하는 거 아닙니다. 각자 자기 일 잘하면 됩니다”라고 건조하게 답하는 사람이다. 새로 시작한 <이태원 클라쓰>에는 IQ 162의 소시오패스 소녀가 등장해 자기 욕구에 충실한 거침없고 ‘똘끼’충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삭막해져 가는 세상에 더욱 따스한 인물은 고사하고 왜 갑자기 ‘공감 불능자’들인가를 살펴보면,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이 화두가 된 젊은층의 시대정서가 엿보인다. ‘김영란법’ 출발 시기, 스승에게 커피 한잔 사는 것이 문제가 되는 세상에 대한 우려와 비난 의견이 쇄도했다. 작은 정성조차 불법이 되는 삭막한 곳이 사람 사는 곳이겠냐고 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모르는 것 같다. 5000원짜리 브랜드 커피를 사는 것이 어떤 학생에게는 사소한 일이지만,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하는 학생에게는 큰 부담일 수 있다는 것을.

작은 정성에 대한 고마움이 남다른 관계와 의리를 만들고, 한솥밥의 예의가 불법과 불공정의 시작점이 된다. 공감과 예의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지만, 반대로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드는 부패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청년은 인맥이 엮이자 좀 봐주겠다는 형사에게 말한다. “법대로 하시라. 항상 모든 것은 이렇게 사소하게 시작된다”고. 최근 등장하는 문제적 주인공들은 두려움 없이 과도한 관계망에 선을 긋고, 망설임 없이 권력에 대항하며 대리만족과 쾌감을 선물한다. 그들의 공감 불능은 여전히 권위와 연고집단 온정주의에 갇힌 낡은 세상에 도전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 가면으로 보인다.

2012년 독일 대통령이던 크리스티안 불프가 취임 2년 만에 사퇴했다. 지위를 이용한 부당 이득으로 인한 여론 악화 때문이다. 휴가 때 친구의 도움으로 호텔 객실을 업그레이드했고, 집을 짓기 위해 일반인 대출 금리보다 1%포인트 낮은 특혜 대출을 받았고, 자동차 판매원이 불프의 아들 생일선물로 장난감 차를 선물했다고 한다. 실소할 내용이지만, 그가 누구든 내용이 크든 작든 단순 명쾌한 원칙의 준수가 세계 최강국 독일의 힘이 아닌가 싶다.

요즘 청년세대는 버스 줄이 너무 길어 뒷문을 열어주어도 줄을 깨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먼저 줄 선 이들과의 공정성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이 점차 독일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뜨거운 정의의 언어가 아닌 차가운 투명성을 신뢰하는.

박선화 마음탐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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