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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세상읽기] 선거법 개정이 진보정치에 주는 교훈 / 신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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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진욱 ㅣ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통과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가까이는 4월 총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멀리는 한국 정치의 판세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비례대표제는 특히 한국의 진보정치가 오랫동안 염원해온 제도 개혁의 목표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번 선거법 개정이 진보정치에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한국의 현행 선거제도는 양대 정당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역구 기반 단순다수결제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므로 한국 정치에서 비례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선거정치의 대표성, 책임성,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제의 하나다. 그런데 이번 선거법 개정의 과정과 내용은 세 가지 문제를 드러냈다.

첫째, 이번 선거법 개정 내용은 너무나 한계가 커서 개혁이라 부를 수도 없다. 독일처럼 지역구 의석과 비례제 의석의 균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조금은 더 나아갔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개정은 비례제 원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삼중의 자물쇠를 걸어놓았다. 전체 의석 중 15% 남짓한 비례제 의석을 전혀 늘리지 않은 ‘미니’ 비례제이고, 그 얼마 안 되는 비례제 의석 중 절반만 연동형 원리를 적용하는 ‘준’연동형이며, 이번 선거에선 거기에 30석 상한선까지 씌운 ‘캡’ 연동형이다.

이런 ‘미니·준·캡’ 선거법 개정의 개혁성은 참으로 미미해서 기존 선거제도의 논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왜곡된 정치적 다이내믹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세 가지 점이 특히 우려된다. 우선 얼마 안 되는 비례제 의석을 놓고 수많은 군소정당이 다투는 형세라, 결국 가장 운 좋은 자가 이득을 볼 것 같다. 또한 자유한국당의 ‘위성정당’ 발상처럼, 기성정당이 제도를 악용하여 벼룩의 간을 빼먹을 수 있다. 끝으로 승자독식 체제가 흔들리긴커녕, 기성정치의 각축장에 비례제 정치의 작은 판이 흡수될 것 같다.

둘째, 진보정치를 위해 정치제도를 개혁한다는 목표 자체에 모순과 난점이 있다. 진보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 폭력과 비참을 바로잡고 이겨낼 실질적 정책을 창안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한국의 진보정치는 오랫동안 정치제도 개혁을 외쳐왔다. 대표적인 3종 세트가 바로 비례대표제, 의원내각제, 지방분권제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한국에서 진보정치가 성장하지 못한 이유가 이런 정치제도의 부재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여기에 모순이 있다. 선거제도는 정치경쟁의 규칙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려면 절대다수의 동의를 거치게끔 되어 있다. 진보정치를 지향하는 군소정당에 유리하게 제도를 바꾸는 데에 거대정당들의 동의가 필수인 것이다. 이 모순을 돌파할 힘은 기성정당과의 협상에서 생길 수 없다. 많은 사람이 개혁을 지지해서 압력을 넣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제도 개혁이야말로 시민들이 자기 문제로 체감하기 힘든 의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모순 혹은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셋째, 비례대표제 자체가 양면성이 있어서 앞으로 이를 확대하려면 보완책이 필요하다. 적잖은 진보주의자들이 비례대표제를 절대선처럼 믿어왔다. 세 가지 근거가 있었다. 승자독식제와 달리 지지율대로 의석에 반영하여 민주적 대표성을 높이며, 인물이 아니라 정당에 투표하므로 정당정치를 강화하고, 거대양당의 전횡이 아니라 다당제의 경쟁을 고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선명한 선악의 세계라기보다는 모순, 역설, 이율배반과 불완전함으로 가득한 세계다.

우선 지지율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상 좋은 것이지만, 그 이득을 진보정치만 보는 것은 아니다. 우파 군소정당도 쉽게 부상할 수 있다. 또 정당정치의 강화란 시민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권력의 강화를 뜻할 수도 있다. 비례제 정치에 유권자가 통제할 수 없는 꼼수와 독단, 부패와 담합이 개입할 수 없게 해야 한다. 끝으로 다당제가 양당제보다 나으려면 제한된 수의 믿을 만한 정당들이 꾸준히 경쟁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군소정당이 난립하고 기성정당이 이들을 회유하는 식이면 안 된다.

이런 여러 문제가 진보정치에 주는 교훈은 한곳으로 모아진다. 정치제도를 개혁할 힘도, 그 개혁이 진보적 결실을 맺게 할 힘도, 결국 삶의 현장에서, 정치의 실질적 의제들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정치개혁에 몰두할수록 정치개혁이 멀어지는 역설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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