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코즈모폴리턴] 세계 여성의 외침, “당신이 강간범” / 조일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주말(18일, 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은 겨울비가 흩뿌리며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러나 내셔널몰 광장에서 백악관 앞으로 향하는 여성 수천명의 열기는 뜨거웠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여성행진’ 참가자들이었다. 이날 시위의 정점은 참가자들의 집단 퍼포먼스였다. 리듬을 탄 구호가 절제되고 단호한 율동과 함께 울려 퍼졌다.

“가부장제는 우리의 재판관/ 태어날 때부터 우릴 가두지/ 그리고 우릴 처벌해/ 그건 당신이 보지 못하는 폭력

그건 여성살해/ 살인자에 대한 불처벌/ 그건 우리의 실종/ 그건 강간

내가 어디에 있었든, 어떤 옷을 입었든, 그건 내 잘못이 아냐(4차례 되풀이)

강간범은 바로, 당신/ 전에도, 지금도, 당신/ 바로 경찰/ 바로 판사/ 바로 시스템/ 바로 대통령

이 억압적 국가가 마초 강간범/ 강간범은 바로 당신!(4차례 되풀이)”

‘당신이 강간범’이란 제목의 이 퍼포먼스를 만든 이들은 칠레의 페미니스트 집단 ‘라스 테시스’였다. 스페인어로 ‘이론’, ‘의견’이란 뜻이다. 지난해 11월 25일,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에 맞춰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국립경기장 앞에 수 만명의 여성이 모여 처음 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강렬하고 명징한 이 퍼포먼스(▶동영상 바로가기)는 소셜미디어와 세계 언론의 보도를 타고 급속히 확산됐다. 멕시코, 콜롬비아, 터키, 프랑스, 스페인, 영국, 미국 등 세계 여성이 팔을 앞으로 곧게 뻗어 손가락으로 정면과 주위를 가리키며 외친다. “바로 당신이 강간범”이라고.

이들이 근절을 외치는 ‘강간’을 본뜻으로만 좁게 해석할 일은 아니다. 여성에 대한, 나아가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자와 권력의 모든 폭력’으로 봐야 한다. 여성들이 퍼포먼스에서 지목한 ‘강간범’도 “바로 당신”에서 시작해, 경찰, 판사, 시스템, 억압적 국가로 점차 폭이 넓어진다. 약자들은 강자가 의식하든 못하든 함부로 휘두르는 폭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폭력은, 그것이 완력이든 권력이든 군사력이든, 인간성 파괴를 넘어 생명 자체에 대한 위협이기 십상이다.

미국의 여성행진은 3년 전인 2017년 1월 21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날 처음 시작됐다.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시들에서 트럼프 당선에 실망하고 분노한 여성들이 320만~520만명이나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 역사상 단일 시위 참여자로 최대 기록이다. 이날 행진이 미국 도시들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서울을 비롯해 84개국의 주요 도시에서 세계 여성들이 연대 행진에 나서면서, 연례행사로 자리잡았다.

미국 여성행진 누리집의 설명에 따르면 “이 행진은 비폭력 저항을 통한 압제 시스템의 해체, 그리고 자기결정권과 존엄, 존중에 바탕한 사회통합 구조의 건설에 헌신”하는 정치 운동이다. 폭력과 불평등 종식, 성소수자·노동자·장애인·시민·이주자들의 권리 옹호, 환경 정의를 추구한다. 마침 올해는 미국 여성들이 처절한 투쟁으로 참정권을 쟁취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틀 뒤인 20일, 워싱턴과 맞닿은 버지니아주의 주도 리치먼드에선 총기 규제에 반대하고 총기 보유권을 옹호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자동소총을 둘러멘 시위 행렬은 중무장 민병대를 연상케 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백인 남성이 대다수인 시위자들은 “총이 생명을 구한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윗에 “우리의 위대한 수정헌법 2조(총기 소유 허용 조항)이 털끝만큼도 보호받지 못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글을 올려 이들을 거들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민간인의 총기 소유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걸핏하면 벌어지는 총기난사 사건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총기 옹호 시위가 벌어진 이날은 마침 ‘마틴 루서 킹의 날’(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이었다. 1960년대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인종차별과 민권운동을 이끌다가 암살된 킹 목사를 기리는 날이다.

불과 이틀 사이에 벌어진 두 시위는 참가자뿐 아니라 시위의 방법과 명분까지 뚜렷이 대조됐다. 세계 여성들이 “바로 당신이 강간범”이라는 절규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 킹 목사가 꿈꾸었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날”은 지금 당장 타자에 대한 모든 형태의 폭력을 그만두는 것으로 앞당길 수 있다.

한겨레

조일준 ㅣ 국제뉴스팀 기자

iljun@hani.co.kr

▶네이버에서 한겨레 구독하기
▶신문 보는 당신은 핵인싸!▶조금 삐딱한 뉴스 B딱!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