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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21세기는 한국의 세기 예언한 경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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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명예회장 영전에

경향신문

롯데그룹 신격호 명예회장께서 타계했다. 재계의 거목이 영면하게 됨에 깊은 소회를 느낀다.

사람들은 신 명예회장을 일본에 뿌리를 둔 재벌그룹의 총수로만 기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누구나 ‘한국은 절대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호언하던 시절, ‘21세기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의 세기가 될 것’라고 예언했던 경제인이다.

신 명예회장의 마지막 수년간의 복잡한 가족사에 가려 그의 탁월한 예지력과 열정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를 위해서나 한국 경제를 위해서나 안타까운 일이다.

꼭 20년 전인 2000년 1월 말 무렵 나는 신 명예회장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일본계 기업 마루베니 한국지사에 근무하던 때였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29층에서 마루베니 본사 부사장과 한국지사 대표와 함께 신 명예회장과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식사를 마칠 무렵 신 명예회장이 새로운 화두를 꺼냈다. ‘스피드’와 ‘컬러’가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뉴밀레니엄 시대에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전혀 준비없이 앉아서 대화를 경청만 하던 나는 평소 하던 대로 별 고민없이 답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글쎄요, 일본 사람들은 무엇보다 근면 성실하고 자기가 속한 조직에 충성하며 최선을 다해 좋은 물건들을 생산하여 세계시장에 공급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세계적인 산업대국으로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신 명예회장은 의외로 머리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고 했다. 일본은 전후 잿더미 속에서 자재-중간재-조립의 협력체계를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구축하고 생산효율을 극대화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했지만 21세기는 달라질 거라고 했다. 지금도 나는 당시 신 명예회장이 했던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신 명예회장은 “화려하게 상상하고 빠르게 뛰는 쪽에 ‘가치메’(승리)가 있을 거예요”라고 했다.

이때 마루베니 지사장이 “한국 청년들은 확실히 일본 젊은이들보다 활력과 역동성이 넘치는 것 같아요. 병역 복무기간 중에 훈련과 행군을 통하여 갈고 닦은 체력과 정신력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 명예회장은 또다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지금의 한국 젊은이들은 우선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발랄하게 자라면서, 글로벌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빠르게 달리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한국은 정보기술(IT) 기반의 산업과 컬러풀한 유행을 창출해 낼 겁니다.”

나는 일본계 기업에 근무하면서 소위 한국병에 대해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한국의 상층부는 지나친 양반의식의 병폐에 젖어 있고 노동자들은 근로정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직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여 걸핏하면 파업을 일으키며, 심지어 공장을 점거하고 주인도 쫓아내면서 노동자 천국을 만들려는 발상들이 팽배해 한국의 미래 발전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1997년 일본 종합상사인 도멘(東綿) 한국지사 주재원으로 근무했던 모모세 다다시는 한국생활 경험을 가지고 쓴 책에서 “한국은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면 어떤가. 현대 산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휴대폰, 자동차, TV, 조선, 그리고 문화·예술 분야에서 지금 일본은 한국과 비교하여 어떤 위치에 있는가.

타계한 신 명예회장을 미화하거나 한·일 간의 산업 및 문화 분야에서 이제 한국이 일본에 비해 확실하게 우위를 점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누구나 ‘한국은 절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열패감에 젖어 있을 때, 한국 젊은이들을 통해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보고 고국에 자신의 인생 2막을 투자했던 경제인으로서 그의 높은 예지와 통찰력, 뜨거운 열망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1942년 기회의 땅 일본에서 사업가로서 꿈을 키우고 연어가 망망대해에서 모천회귀를 하듯 1967년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각종 산업을 일으키고, 30여년 꿈이 묻어 있는 잠실 마천루 49층에서 홀연히 소천한 신 명예회장의 명복을 빈다.

류종수 전 마루베니 사장 보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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