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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이렇게나 무거운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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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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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기침할 때마다 컹컹 소리를 냈다. 며칠간 몸살을 앓았다는데 그렇지 않아도 마른 몸이 더 야위어 보였다. 걱정을 안고 기차에 올랐다. 다음날 좀 나아졌나 싶어 문자를 보냈지만 한참이 지나도 읽은 흔적이 없었다. 자정께 어렵게 연결된 친구 목소리는 모기만 했다. 기다시피 병원에 갔더니 유행성 독감이라고 의사가 자가 격리하라고 했다나. 산꼭대기 좁은 임대아파트에 혼자 살며 매일 스스로 격리하는데 고작 그게 처방이라니…. 친구는 온몸이 아프다고 울었다. 뭘 좀 먹어야 기운을 차릴 텐데 빈속에 약만 털어 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친구를 위해 새벽배송에 죽을 시키다



지난해 온라인 쇼핑을 시작했다. 더 전에 거래를 트지 못했던 건 손바닥 안에서 끝나는 쉬운 구매 행태가 행여 습관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디지털 특수고용자, 사이버 노동자 관련 기사를 유심히 읽어온 탓도 있다. 앱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기반으로 거의 모든 것을 배달하는 플랫폼 노동자는 근로계약이 아닌 개인사업자 형태라서 최저임금, 휴일, 휴가, 퇴직금, 사회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배달하다 사고라도 나면 책임도 전적으로 ‘대표’인 자신에게 있다. 이 고약한 노동 시장에 연루되기 싫었다. 그럼에도 급히 볼 책을 구하거나 사러 갈 여유가 없을 때는 아쉬웠다. 가입만 하지 않으면 되지, 뭐. 동료에게 부탁해 두어 번 구매했지만 매번 그럴 수도 없어 내 딴엔 소중한 주민번호나 전화번호 등 달라는 정보는 모두 내놓고(진즉에 털렸을 테지만) 백기투항했다. 온라인 시장에 입문한 지 10개월. 나는 그동안 책, 욕실 발판이나 슬리퍼, 무거운 세제, 요가 매트 따위를 주문해 집 앞에서 받았다.

얼마 전 플랫폼노동자의 고단한 일상을 그린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를 보는데 잊고 있었던 그 물건들이 다시 떠올랐다. 리키의 하루는 배정된 그날분 물건을 배달하려고 운전 중이거나 허겁지겁 뛰는 두 가지 패턴으로 굴러갔다. 리키는 오줌 눌 겨를도 없어 차에 실어둔 페트병에 오줌을 눈다. 그렇게 일말의 짬도 없이 움직이는데 리키 가족의 살림살이는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스크린 속 리키를 보며 다짐했다. 극장을 나서면 휴대전화에 깔린 쇼핑몰 앱을 지워야겠다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으면서도 캄캄한 영화관에서 얼굴이 빨개지도록 훌쩍인 게 멋쩍어서라도 그렇게 했다. 눈물은 빨리 말랐다. 자가 격리된 아픈 1인 가구는 ‘무연 가구’일 뿐이라서, 자정 전에 주문하면 새벽에 배송해준다는 앱을 휴대전화에 다시 깔았다. 나는 죽, 두유, 부드러운 빵, 손질이 덜 가는 과일을 클릭해 장바구니에 담고 주문서를 작성했다. ‘라이더’가 안전하게 도착해준다면 친구는 죽 한술은 뜰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인 소비는 가능한 걸까



어려선 어른 따라 재래시장 가는 재미가 컸다. 지금 아이들의 시장은 종종 대형마트이고 아이들은 거기서도 신나게 논다. 그러나 최근 우리 지역에서는 이름만 대면 모두 아는 대기업 마트가 문을 닫았다. 영업실적이 저조했기 때문에 폐점을 결정했다는데, 아마도 소비자들이 오프라인 매장을 떠나 온라인 쇼핑으로 가버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대형마트가 흥하고 재래시장이 망해갈 때 마트만 안 가면 되는 줄 알았지만, 이제는 사이버 시장에 공룡 마트도 쓰러진다. 이것은 하지 않고 저것은 하려고 애써왔지만 대부분 부질없게 느껴진다. 이토록 복잡하고 어렵게 소비하며 살아갈 줄은 몰랐다. 불매운동이 대세라지만 우리는 정말 수많은 리키들을 사지로 내몰지 않고 윤리적인 소비라는 걸 할 수 있을까. 내 복잡한 심사와는 무관하게 친구가 새벽에 배송된 죽을 먹고 어서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다.

김민아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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