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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장대익 칼럼]100세 시대…‘학생’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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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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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국에서 태어난 아기는 대략 800명이다. 이 중 몇이나 2120년까지 살아 있을까? 무려 400명 이상이란다. 단, 기후 재앙이나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150년 전쯤의 인류 평균수명은 고작 30세였다. 각종 전염병으로 인한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최근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수명은 대략 38세다. 그러니 인류의 수명이 이렇게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은 백신을 비롯한 의료와 보건의 비약적 발전 덕분이다. 현재 한국인은 83세 정도는 산다. ‘100세 시대’가 더 이상 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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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00세 인생의 도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80까지도 지겨운데(사실 외로운데) 100세까지 살아서 뭐하나, 100세를 살면 80세까지는 일해야 먹고살 텐데 힘들어서 어쩌나….’ 노인 자살률이 높은 국가에서 나올 만한 반응이긴 하겠지만 한번 늘어나기 시작한 수명을 억지로 줄이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고령화의 저주”인가? 65세 이상 인구가 1000만명(2019년 803만명)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우선, 60세 전후의 은퇴를 전제로 하는 현재의 노동시장과 이를 근거로 한 복지제도에 대해서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1명 이하인 초저출산 국가이기도 해서 생산가능인구(만 15~64세)의 급감이 큰 우려사항이다. 실제로 매년 생산가능인구가 10만~20만명씩 감소하고 있는데 이 저출산·고령화의 흐름에 잘 대응하지 못하면 현 사회 체계는 붕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진화사를 보면 100세 시대는 새로운 국면이자 기회다. 지금의 60세는 건강 면에서 과거의 40대와 유사하면서 경험 면에서는 20년치가 더 많다. 사회 구조가 은퇴를 강요할 뿐이지 더 유능하게 오래 일할 수 있다. <100세 인생>의 저자인 런던정경대학의 그래튼 교수에 따르면, ‘교육→일→은퇴’라는 3단계 인생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이제 “전일제 학생, 풀타임 직장인, 여생 은퇴자라는 용어는 사라질 것”이며, 이 세 단계가 섞여 있는 복합적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 시스템의 특징은 교육을 늘 출발선에만 배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교육을 재정의하는 일이야말로 고령화 시대를 위한 첫 미션이라고 믿는다. 이를 위한 최우선 과제는 교육 대상을 재설정하는 일이다. 만일 지금 외계인이 인류의 학교를 관찰하고 보고서를 쓴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까? 틀림없이 ‘인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그리고 대학 교육을 위해서 교육 예산의 대부분을 지출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20세까지만 교육을 시키고 나머지 60년은 알아서 하라고 한다’며 의아해할지 모른다.

사실상 우리에게 ‘교육비’란 3~23세에만 지출하는 교육비다. 그 이후 세 배의 기간(60년) 동안 인류는 교육으로부터 완전히 방치되어 있다. 현재 인류의 고등교육은 기껏해야 첫 직장을 잡는 데 유용할 뿐인데 말이다.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우리의 40대 이후(40플러스)의 인생을 보라. 인구통계적 변화만 보더라도 앞으로는 40플러스를 위한 교육 수요가 더욱 크고 강력해질 것이다. 게다가 과학기술의 급격한 변화는 기술 리터러시의 세대 간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릴 것이기에 적응 교육이 가장 절실한 연령층은 40플러스다.

이쯤 되면 ‘평생교육이나 평생학습이 이미 이뤄지고 있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이것은 대학 교육의 일부를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하는 수준이다. 여전히 대학을 정점에 둔 교육 관행이다. 평생학습에 적극적인 분들이 찾는 무크(온라인 대중 공개수업)도 한계가 많다. 탁월한 강사진이 나와도 교육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동료학습을 구현할 수 없기에 완료율이 저조하다. 미네르바 같은 혁신학교도 여전히 대안적 ‘대학’을 지향한다.

대학 제도는 길게는 1000년, 짧게는 500년 전에 유럽에서 시작된 시스템이다. 그때 교육 대상의 평균수명은 길어야 40세 정도였다. 즉 20세까지 배우고 20년을 활용하다 죽음을 맞는 식이었고, 이것도 소수 엘리트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 특권이 확대되어 적어도 지금 한국은 약 70%가 대학을 간다. 그리고 각 가정의 교육비의 거의 전부와 국가 교육 재정의 대부분이 대학을 정점으로 사용된다.

마치 대학 졸업 후 20년만 살다 죽을 것처럼 교육비를 대학에 소진하고 있는 셈이다. 이 관행은 명백한 퇴행이다. 교육 자원을 생애의 여러 단계로 분산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100세까지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

대학에서 과식(過識)으로 소화불량인 학생들을 자주 만난다. 아무리 중요한 지식과 통찰을 전달해도 시큰둥하다. 배움의 자세가 안된 학생들도 시큰둥하기는 마찬가지다.

반면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지식과 지혜에 갈급해 찾아온 40플러스의 눈망울은 오히려 초롱초롱하다. 이 잊혀진 존재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흡수하고 응용할 수 있는 진짜 학생들이다.

국가와 대학, 그리고 가정이 20대까지 쓰는 교육 예산의 10분의 1이라도 40플러스에게 써보자. 목마른 그들에게 생수를 주자. 그래서 목을 축이고 자신뿐 아니라 자녀, 그리고 우리 사회도 돌아보게 하자. 그동안 우리는 청소년을 너무 편애했다. 어릴수록 교육 효과가 클 것이라는 전제를 의심해봐야 한다. 책을 읽으면, 심지어 1주일만 저글링을 해도, 어른의 뇌는 변한다. 뇌가소성에 대한 수많은 연구는 ‘중년의 뇌’의 탁월함을 입증한다. ‘60이 넘어도’ 배울 수 있고, 청년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누가 학생인지를 재고해야 할 때다.

장대익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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