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8 (수)

[이굴기의 꽃산 꽃글]성주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이해복


코밑의 수염도 어쩌지 못하는데 저 멀리 늘 떠오르는 해를 어쩔 수 있겠는가. 혁명은커녕 벽지도 못 바꾸고 달력사냥이나 하는 연말이다. 굴뚝으로 들어가는 산타처럼 기해년도 쫄깃하게 수렴되어 이제 그 어떤 잘록한 구멍으로 들어갈 일만 남았다. 지난주에는 산으로 가던 길을 끊고 삼청동의 사진전으로 갔다. “산속도 속세를 벗어난 선경이요, 도시도 속세 안의 선경”임을 카메라로 포착해내는 이갑철의 “적막강산, 도시징후”.

꽃산행에 나서 우리 강산을 돌아다니면 마음이 한움큼 뽑혀 나갈 때가 있다. 꽃보러 나왔다가 자연의 사정에 마음을 홀랑 빼앗기는 순간이다. 하늘과 산이 연출하는 ‘저절로 그러함’을 목격하고도 놓친 것을 뒤늦게 줍는 느낌과 함께 내 늑골 안쪽의 골짜기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찾는 듯하다.

한 바가지의 적막과 함께 귀가하여 그간 쏘다니며 찍은 꽃사진을 정리하였다. 나름 귀한 꽃, 좋았던 장면의 우열을 다퉈볼까 싶기도 하였지만, 그건 내가 나한테 할 일은 아니었다. 산에서는 비교급도 최상급도 없다. 올해도 절실하게 많이 배운 식물탐사대 꽃산행에서 만난 성주풀에 마무리를 맡겼다.

하루에 갈 수 있는 가장 먼 뭍의 하나인 전남 신안의 팔금도. 그 섬의 가장 높은 채일봉으로 가는 길. 넓은 임도 초입의 산기슭에 철분을 함유한 지하수가 번들번들 흘러나왔다. 귀한 풀들이 자라는 조건의 그 질척한 풀밭에 이삭귀개와 노란 꽃잎의 성주풀이 보였다. 우리나라에는 오직 1종만 자생하고 경북 성주에서 발견되어 그 이름을 얻은 꽃이다. “동아시아의 열대에서부터 난대의 습한 풀밭에까지 자라는 1년초. 전체에 굳은 털이 있고 뿌리는 적갈색. 잎은 대생하며 잎자루가 없고 끝이 뾰족한 피침형. 꽃은 황색, 원줄기 윗부분의 수상화서에 달린다. 꽃받침은 앞쪽이 얕게 터지며 끝이 뾰족하다. 열매는 삭과이며 타원형, 끝이 뾰족하고 종자에 줄이 있다.”(<대한식물도감>, 이창복)

생명의 흐름에서 잠시 사람으로 나왔듯, 도시도 자연이 잠깐 파견한 곳이다. 제아무리 구별되려고 해도 결국 자연에 포위됐고, 나무들이 내어준 공간에 불과하다. 기해년의 막바지에 운좋게 만났던 성주풀. 일년만 사는 풀이기에 지금 그 자리는 뚝, 흔적도 없겠다. 적막하겠다. 그 작은 몸으로 뾰족한 것투성이인 채, 올해의 내 적막을 완성해 주는 성주풀. 현삼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신문 최신기사

▶ 기사 제보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