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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공감세상] 엡스타인의 이기적 유전자 / 김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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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우재 ㅣ 초파리 유전학자

미성년자 섹스 스캔들로 유명한 제프리 엡스타인이 감옥에서 자살했다. 그는 자산 중개인으로 일하며 큰돈을 벌었고, 그 과정에서 미국 상류층 엘리트들과 거대한 인맥을 만들었다. 대표적 인맥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영국의 앤드루 왕자 등이다. 그는 이들과 전세기를 타고 세계 각지를 누볐고, 저택에서 파티를 열었다. 그의 전세기와 파티장에는 어린 여성들이 동원됐고, 엡스타인의 주요 인맥들은 그 어린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엡스타인 스캔들로 여러 공직자가 사직했고, 10대 여성과 성관계를 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앤드루 왕자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엡스타인은 정치인과 재계의 거물들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상하게도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미디어랩에 수십억원을 지원했고, 스캔들이 터지자 미디어랩 소장 조이 이토는 사직했다. 게다가 엡스타인은 에지재단의 회장인 존 브로크먼과 각별한 사이였다. 저자와 출판사를 연결하는 출판 에이전트인 브로크먼은, 에지재단을 통해 700명이 넘는 과학 저자를 보유하고 있고,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해 스티븐 핑커, 대니얼 데닛 등 최고급 과학 저자를 관리한다.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과학교양서 상당수가 브로크먼 재단에 저작권이 있고, 그가 관리하는 과학자의 강연료는 상당히 비싸다. 브로크먼은 엡스타인이 수많은 과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게 연결해준 인물이다. 그는 스티븐 호킹 등 과학자들을 잠수함에 가득 태우고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

엡스타인은 과학자들을 통해 은밀한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려 했다. 바로 자신의 유전자로 수많은 엘리트 여성들을 잉태시켜 세계 곳곳에 자신의 디엔에이를 퍼뜨리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이다. 실제로 엡스타인은 나사 출신 과학자가 노벨상 수상자들의 정자은행을 운영하는 것에 착안해, 뉴멕시코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여성을 수태시키는 아기농장을 만들려 했다.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철학 사조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는 과학기술과 약물 등을 활용해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 신념과 운동이며, 새로운 우생학으로도 불린다.

엡스타인의 파티에 초대된 과학자 중 일부는 그의 우생학적 계획에 동조했다. 엡스타인은 인체 냉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자신의 머리와 성기를 냉동시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스캔들이 터진 이후 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엡스타인이 가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생각 대부분은 엉망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엡스타인은 하버드의 한 모임에서 빈곤층이 굶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도록 돕는 일을, 인구 과잉의 위험을 높인다는 이유로 비판했다고 한다. 새로운 우생학에 경도된 백인 엘리트, 엡스타인이 보여준 미국 상류층의 단면이다.

도킨스의 책을 읽고, 대학원 시절 에지재단의 글을 챙겨 읽은 적이 있다. 도킨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에지재단과 브로크먼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는데, 그 수많은 필자들 대부분이 백인 남성이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특히 브로크먼이 기획한 많은 책들은 과학을 도구로 세상을 계몽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계몽주의는 역사적 성찰이 부족한 과학자들의 객기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특히 브로크먼이 기획한 책들은 백인 엘리트 과학자가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라는 묘한 상징을 감추고 있다.

엡스타인-브로크먼 스캔들이 터졌는데도, 국내의 교양과학 전도사들은 침묵 중이다.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작가 칼 지머는 엡스타인 스캔들이 터지자, 에지재단에서 탈퇴해버렸다. 스티븐 핑커는 변명이라도 했다. 하지만 브로크먼이 기획한 수많은 책을 출판한 국내의 기획자와 대중과학자 모두 침묵 중이다. 브로크먼이 기획한 책들이 엡스타인의 성추문과 관계없다고 변명하고 싶을지 모른다.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과학은 세상 모든 일에 중립적이라고 말할 텐가. 이제 과학자들이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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