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6 (일)

[조용헌 살롱] [1224] 배의 선수와 선미에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명산의 산신령 손바닥에서 놀던 토끼가 배를 타고 넓은 바다에 나간다는 것은 용궁 체험에 해당한다. ‘나의 에고(ego)가 넓은 대양(大洋)으로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대양이 나의 에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인가?’

환경재단에서 주관하는 그린보트를 타고 일주일 동안 부산에서 제주도를 거쳐 대만을 왕복하는 크루즈 항해를 해 보았다. 환경재단 최열이 산속에 있던 토끼를 바다로 불러내었다. 14층까지 있는 5만t급이다. 큰 배의 맨 앞쪽인 선수(船首)와 배의 뒤쪽인 선미(船尾)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던 일이 일주일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배가 앞을 향해 가는 선수에서 바라다보는 바다는 '새 바다'였다. 선미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헌 바다'였다. 선수에서는 바늘로 꿰맨 자국이 없는 순결한 바다를 뱃머리가 가르면서 항해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선미에서는 대형 스크루가 힘차게 돌아가면서 바닷물을 세탁기처럼 돌려 버린다. 거의 3m 크기에 가까운 대형 금속제 스크루 2대가 회전하면서 만들어내는 하얀색의 포말(泡沫)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선미의 포말이 200m쯤 포말 자국을 유지하면서 뒤로 밀려 흘러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다시 대양과 하나로 합쳐지면서 그 흔적이 소멸되고야 마는 모습을 말이다. 선수의 바다는 희망에 부풀고 진취적인 바다이지만 배의 뒤쪽에서 포말의 자국을 바라다보는 바다는 지난 삶을 회고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배의 스크루는 인간 욕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색명리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인간 욕망의 힘은 저 스크루처럼 쉬지 않고 돌아간다. 그리고 바닷물의 색깔도 변화시킨다. 검은 흑조(黑潮)처럼 보이는 바닷물이 일단 스크루에 감겼다 나오면 하얀색의 포말과 함께 비취색 같기도 한 '깊고 푸른색'의 바닷물로 색깔이 변한다. 이 깊고 푸른 바닷물은 황홀한 색깔이기도 하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흡인력이 있다.

스크루라고 하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내는 이 아름다운 물거품. 왜 이 물거품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일까. 인간의 끈적끈적한 욕망이 더러운 게 아니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이치를 배 뒤쪽의 선미에서 알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 욕망의 흔적들도 다시 대양과 합류되면서 언제 그런 자취가 있었냐는 듯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게 인생의 이치란 말인가. 그 이치를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 선미에서 관조(觀照)를 배웠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