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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매경데스크] 586세대와 국제화 역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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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0년, 20년 뒤를 걱정하는 586을 만나본 적 있나요?"

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학번으로 대학을 다닌 지금의 50대를 뜻하는 586세대가 요즘 욕을 많이 먹는다. 실력도 없이 중요한 자리를 꿰차고 앉아 온갖 기득권을 누리며 젊은 세대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꼰대론'이 지탄의 근거다.

그러나 싸잡아 할 얘기는 아니다. 누가 뭐래도 나라의 수준을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달러대로 끌어올린 산업화의 주력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586세대라면 학생운동권의 민주화 기여를 먼저 떠올리지만 훨씬 더 많은 586들이 산업전선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했다. '치열하게 사셨다'는 찬사는 충분히 들을 자격이 있다.

밀레니얼 세대가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겠으나 586세대의 경쟁력은 국제화였다.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실시되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란 책을 펴낸 게 1989년이다. 수출 호황에 88올림픽의 자신감까지 충만했다. 선배 세대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주눅 들지 않고 전 세계를 누빈 첫 번째 세대가 586이다.

586의 국제감각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하기도 했다. 월급쟁이들이 자녀를 해외로 유학 보내고, 글로벌 재테크에도 겁을 안 냈다는 세대다. 심지어 기업의 꼭대기에 오른 586들은 요즘 공장과 연구개발(R&D) 거점의 해외 탈출을 결행 중이다. 무시무시한 기세의 엑소더스를 지휘하고있다.

국제화의 가장 큰 축복은 보편타당한 관점이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가치, 제도, 관행을 경험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경쟁력이다. 기업인, 공무원, 학자, 엔지니어가 된 586들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면서 선진국 추격에 앞장설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586세대가 한국 사회를 장악한 최근 들어서는 외국인들이 '한국이 왜 저러고 있지'라고 의문을 품을 만한 일들이 잇따르고 있다. 혹자는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국제화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586 정치인들을 지목하기도 한다. 한국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갈라파고스 규제'의 경위를 쫓다 보면 그런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기득권에 집착하다 보니 미래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는 비아냥도 들린다.

이를테면 타다 금지법 같은 게 그런 예다. 공유 서비스를 둘러싼 갈등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정치권이 어느 한쪽 편만 드는 경우는 드물다. 택시 등 전통 업계 종사자의 생존권 못지않게 혁신과 소비자 효용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런 일이 대놓고 벌어진다.

선배 세대의 과업은 다음 세대들이 활약하기 좋은 나라를 물려주는 것이다. 적어도 밥통은 깨지 말아야 한다. 586세대가 욕을 먹는 건 스스럼없이 다음 세대의 밥통을 걷어차고 그들 몫까지 앞당겨 쓰고 있기 때문이다. 표류하는 연금 개혁이 그렇고, 내년에 60조원 찍어낸다는 적자국채, 대책 없이 굴러가는 건강보험이 그렇다. 무엇보다 제조업 공동화를 앞당겨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다. 정상 국가에서는 방치될수 없는 세대 간 불평등이다.

얼마 전 40대 초반 후배로부터 '미래를 염려하는 586을 만나봤느냐'는 힐난을 듣고 아차 싶었다. 실제로 10년, 20년 뒤를 말하는 586을 만나본 게 까마득했다. 그나마 기업인들은 사정이 낫지만 그것도 결국은 자기 회사 얘기에 그친다. 사업을 하는 이 후배는 "국제적으로 이해 안될 것들만 골라서 한다"며 "586세대가 한국을 '이상한 나라'로 역주행시키고 있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한때 국제화 기수였던 586세대가 지금 '국제화 역주행'으로 비난받는 현실은 가슴 아픈 아이러니다.

[이진우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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