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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김인숙의 조용한 이야기]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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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안톤 슈나크의 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첫 문장이다.

울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슬퍼지는 것은 나 역시 언젠가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어서일 것이다. 굶주린 세월을 살지는 않았으니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울지는 않았을 것이고, 전쟁을 겪지 않았으니 충격적인 공포와 상실로 인해 울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에 비견할 만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이 없지 않으나 대개는 아주 사소한 이유, 어린아이들의 별것 아닌 다툼, 터무니없는 서운함, 사소한 소외와 사소한 외로움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울었을 것이다.

경향신문

그러나 그 별것 아닌 슬픔이 그 나이의 그 아이에게는 세상 전부와 맞바꿀 만큼 거대한 비통함이기도 했을 것이다. 슬픔과 고독은 평균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것이 더 크고 누구의 것이 더 작지 않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정성껏 위로받아야 하고, 사소한 이유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겠다.

어른이 된 후 아이의 울음을 볼 때 더욱 슬퍼지는 것은 그것이 내 과거의 한 장면일 뿐만 아니라 내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어제도 울고 오늘도 울었는데, 내일은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어제 잘못되었던 것은 내일은 괜찮아질까. 그럴 리가. 오늘도 이렇게 괜찮지가 않은데, 하는 기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슬픔이 위로받아야 하겠으나 그릇된 것에 대해서까지 그런 것일 리는 없다. 그저 그릇된 것이 아니라 매우 잘못된 것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슬픔을 위로하는 방식은 그 슬픔을 야기하는 원인에 대한 냉정한 직시와 교정과 대항에도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여전히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이 미래에도 그럴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나빠질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홍콩의 시위대를 인터뷰한 내용 중 이런 구절을 읽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적어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우리의 뒷세대는 알게 될 테니까요.” 실탄이 발포되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시위 현장에서의 이와 같은 발언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절박함을 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지금 처음 듣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얼마 전 홍콩 작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택시 운전사>를 봤다며 반갑게 말했다.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말하는 동안 여러 번 ‘광주’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에게 그 영화가 중요한 이유를 나는 대뜸 이해했다. 그가 그 영화를 보다가 잠깐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그 영화를 통해 광주항쟁을 보았겠으나 역으로 나는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그를 통해 홍콩을 보는 듯했다. 어른인 우리는 그 얘기를 하면서 잠깐이나마 울지 않았으나,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으나, 슬펐다. 광주항쟁이 벌써 40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놀랍다. 그로부터 많은 일이 시작되었고,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해에 광주에서 흘렸던 눈물과 피에 빚진 것들이 너무 많다.

세상은 한순간에 통째로 바뀌지 않으니 천천히 달라지며 천천히 나아져야 하는 것이겠으나, 그로부터 40년 후의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여전히 가슴을 흔드는 슬픔과 또는 감동과 또는 비통함과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있다.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전직 대통령의 행태 때문이다. 군사 반란사건인, 그리고 그 후 군사독재를 이끌게 된 12·12 사태를 기념하기 위해, 말하자면 기리기 위해 고급 음식점에서 오찬을 즐겼다고 한다. 본인이 치매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 사람은 절대로, 죽어도 치매도 걸리지 않을 것만 같다. 그는 절대로 반성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고, 처벌받지도 않는다. 이상한 세월이다. 40년이나 흘렀는데, 여전히 너무나 이상해서, 나는 혼자 잠깐 얼굴을 가린다.

연말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보다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거나 환희에 차게 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슬프게는 하지 않는 것. 보통 사람들의 가만한 일상, 때때로 실수는 하지만 곧바로 후회하고 반성하며 부끄러워하는 삶, 그래서 금방 자신의 가족에게 그렇듯 타인에게도 따듯해질 수 있는 삶. 연기하지 않는 정치인들, 솔직한 정치, 걱정하지 않는 집값과 보험료, 공손한 검찰, 겸손한 경찰, 부끄러움을 아는 사장님들, 건강한 청년들, 모욕당하지 않는 여성들, 그냥 보통의 당신, 보통의 나. 그리고 때때로 울지만 금방 언제 울었냐는 듯이 활짝 웃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웃음소리, 웃느라 발그레해진 얼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한 우리의 미래, 그런 것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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