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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산책자]눈에 보이는 것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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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이 넘은 어머니가 무릎 수술을 받으셨다. 시골 병원에서는 연로한 분에게 전신 마취가 더 무서운 거라며 수술보다는 약해진 무릎을 잘 달래어 활동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권했다.

경향신문

가족은 생각이 조금씩 달랐다. 잘못될 수 있지만 움직이실 수 있어야 하니 수술하자는 파와 이제 활동적인 삶보다는 조용히 사시더라도 노후를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파로 나뉘었다. 가족의 의견은 어머니의 의지 앞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마른 나뭇잎이었다. 그냥 걱정을 날려버리고 수술을 택했다. “죽더라도, 살게 된다면, 걸어야지”라고 띄엄띄엄 이어지는 어머니의 작은 목소리에 실린 뜻이 강했다. 서울에 사는 막내로서 나는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간혹 찾아뵈어도 재롱이나 피우다 오는 처지였다.

다행히 수술 후 회복하시는 중이다. 기차를 타고 병문안을 갔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내 머릿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활발하고 쾌활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누워 있는 몸은 너무나 마르고 작았다. 무엇보다 음식을 쉽사리 취하지 못해 힘을 내시지 못했다. 이것이 삶인가 착잡했다. 한편 어머니에게 나는 성장을 멈춘 모습으로 보이는 듯했다. 밥은 제대로 먹고 사는지, 사회생활은 제대로 하는지, 스무 살 청춘을 대하듯 걱정이 많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나는 젊은 어머니가 늙어가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나를 영원히 늙지 않는 철부지로 대한다. 애정과 걱정의 마음이 그렇게 보아주는 것이라고 하기엔 내가 보여준 행동이 스무 살처럼 철없고, 어리광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 본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어느 가족>으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프랑스 배우들과 작업한 작품이다. 대배우인 엄마 파비안느와 그의 오만하고 다소 못된 면모가 싫고 진실하지 못한 회고록에 불만이 큰 딸과의 서걱거리는 관계를 기록했다. 가족 이야기에 탁월한 경지를 이룬 감독의 작품답게 유머와 위트가 넘칠 뿐 아니라, 영화는 매서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가족이 모두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합니까. 어느 정도 연기를 하더라도 진실 탐구 때문에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감독은 메시지를 던지는 듯했다. 엔딩은 따뜻하게 모녀가 화해에 이른다. 언젠가 감독이 고백한 작품론이 떠올랐다.

“전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일상적인 것, 행위와 대사를 모두 포함해서요. 주방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현관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탄생할까, 구체적인 사물이나 장소에 사람이 얽힘으로써 인간의 개성과 감정이 보이는 것이므로 연기자에게 딱 거기에서 멈추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하고 싶었죠.”

눈에 보이는 것에 삶이 있다는, 구체적인 것에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말은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상적 행위에 인격이 있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인사하는 것 같은 눈에 보이는 행위로 인간을 표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가장 친밀하다고 여기는 가족에게는 이 일상의 행동에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마음으로 느끼고 이해한다고, 그렇게 마음이면 된다고 짐작하고 믿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 보이는 행위로 판단하게 하자.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는 일상생활에서조차도 연기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배우의 삶을 전제로 이 문제를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삶의 진실을 추궁하는 딸에게 대배우 엄마는 진실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사 연습하듯이 연기하는 것이라고, 연습이 필요한 것이라고 응대한다.

울라브 하우게의 시가 말한다.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 대양이 아니라 물을 원해요/ 천국이 아니라 빛을 원해요/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세요/ 새가 호수에서 물방울을 가져오듯/ 바람이 소금 한 톨을 가져오듯.”

내가 사랑이라고 말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죽을 한 수저 더 떠먹여 드리는 것이 맞다. 자주 못 뵈어 미안해, 라고 말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상태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행위가 낫다. 새가 호수에서 물방울을 가져오듯이 작지만 확실한 행위를.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며 사랑한다는 이유로 방심하며 살았다는 자각이 등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한 해가 저무는 때, 또 얼마나 이기적으로 내 마음의 상태만 들여다보았는지, 그 마음을 몰라준다고 혼자서 섭섭해하던 관계는 어찌해야 할지 작은 답을 얻었다. 보이는 것을 잘하고 싶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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