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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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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별 임금격차 OECD 1위… ‘성평등 임금공시제’로 해결 방안 찾아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은 지난 3월 8일 오후 3시. 전국에서 ‘3시 STOP 조기퇴근 시위’가 열렸다.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를 8시간 노동으로 환산해보면 여성은 오후 3시부터 무급 노동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취지다. 한국여성노동자회·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 단체들이 2017년 시작해 매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다. 2000년 조사 이래 줄곧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2017년 성별 임금격차는 34.6%. 격차가 30%라면 남성 임금이 100만원일 때 여성 임금은 70만원이라는 의미다. OECD 평균은 13.5%다. 조기퇴근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차별적인 임금실태를 공개하고 격차를 해소하라”고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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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3시 STOP 조기퇴근 시위’ 참가자들이 직장에서 겪는 성불평등 사례를 찢고 있다.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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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발을 떼다

서울시가 가장 먼저 응답했다. 서울시는 지난 12월 9일 22개 모든 투자·출연기관의 기관별 성별 임금격차와 기관별·직급별·직종별·재직연수별·인건비구성항목별로 분석한 결과를 시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성별 임금격차는 46.42%에서 마이너스 31.57%로 나타났다. 마이너스는 여성 임금이 더 높은 경우다.

성별 임금격차가 생긴 데는 전체 노동자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고 근속기간이 남성보다 짧다는 점이 작용했다. 전체 노동자 가운데 여성 비율은 18%였다. 평균 근속기간은 남성이 여성보다 7.7년 길었다. 대다수 기관에서 상위직급(1~3급)으로 갈수록 여성 비율이 낮아지는 점, 건축·토목·기계 같은 분야는 남성 중심 직종이라는 인식이 강한 점도 임금격차를 발생시키는 요인으로 분석됐다.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는 1~2급에 여성이 없고, 건축·토목 직종이 많은 서울주택도시공사는 1~3급에서 남성이 88%를 차지했다. 서울여성가족재단(-31.57%)과 서울장학재단은 여성 임금이 남성보다 높았다. 두 기관 모두 상위직급 여성 비율이 높다.

서울연구원(46.42%), 서울산업진흥원(37.35%), 서울에너지공사(40.99%) 3개 기관은 한국 평균(34.6%)보다 격차가 컸다. 서울연구원과 서울산업진흥원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이 2017~2018년 대거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업무에 종사하는 여성 전환자가 많아 격차가 일시적으로 발생했다고 시는 설명했다. 서울에너지공사는 남성 재직기간이 여성보다 길고, 교대근무직을 모두 남성이 맡고 있어 격차가 벌어졌다.

서울시는 이번에 나타난 성별 임금격차 중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차별적 요소를 파악해 개선점을 찾아나간다는 계획이다. 성평등 임금공시 대상을 투자출연기관의 비정규직과 시 민간위탁기관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내놓은 ‘성평등 임금 실천을 위한 가이드라인’에는 “성별 임금격차는 다양한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성차별의 결과”라고 나와 있다. 노동자의 채용, 배치, 순환·보직, 교육·훈련, 승진 등 인사관리 전반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한 기회와 조건, 결과를 제공하지 않을 때 차이가 생기고 성별 임금격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조직에 뿌리박힌 성별 고정관념이 임금격차를 당연하게 만들어 문제를 인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남자는 가장이니 좀 더 줘야지’, ‘여자는 곧 애 낳을 거니까 핵심 업무를 못 맡겨’, ‘리더는 아무래도 남자가 해야지’, ‘우리는 여자 안 뽑아. 어차피 결혼하면 그만둘 텐데.’ 이런 고정관념들이 아직도 한국사회를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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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3월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조기퇴근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이 성별 임금격차에 항의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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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되는 차이, 설명되지 않는 차별

“고소득 직종에 주로 남성들이 있고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서비스직에 많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는 일이 다른데 어떻게 숫자만 놓고 비교하나요?”

성평등 임금공시제 논의에는 이런 의문이 따라붙는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흔히 동일한 직급까지 올라가야 비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차별의 피해자는 문이 없는 벽 앞에서 서 있는데 왜 문을 열지 않았냐고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배 대표는 “서울시의 경우 공공기관이라 성별 임금격차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는데 뚜껑을 까보니 똑같았다. 비정규직 여성들이 공무직으로 들어와 있었고, 상위직에는 남성들이 많았다. 이 상태가 당연하다고, 격차는 있지만 차별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전제해버리면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 아나운서만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사측에 문제를 제기한 대전 MBC 여성 아나운서의 예를 들었다. “여성 아나운서를 두고 ‘자기가 계약직으로 들어와 놓고 채용 성차별 이야기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초에 들어갈 수 있는 문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성차별로 인해 발생하는 임금격차는 연구결과로도 나타난다. 김난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통계청의 ‘2018년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원자료를 분석해보니 남녀 임금격차는 시간당 5085원으로 나타났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차이’로 인한 격차는 1687원(33.2%)이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성별 임금격차의 원인으로 꼽은 교육·훈련, 근속연수, 직종, 전일제 및 시간제, 기업규모, 노조 유무 등이다. 설명되지 않는 ‘차별’로 인한 격차는 3399원(66.8%)이나 됐다.

설명되는 차이 가운데 ‘근속연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다. 1687원 중 1069원이 근속연수 때문에 생겼다. 남녀 근속연수 차이는 곧 여성의 경력단절을 말한다. 김난주 부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한국 여성의 경력단절은 30대에 집중되는데, 이는 여성노동자의 경력 형성에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경력단절 이후 노동시장에 재진입했을 땐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꼬리표로 성차별과 연령차별에 직면한다. 경력단절 이전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돌봄을 담당하며 저임금 노동으로 편입하게 된다. 한국 여성은 20대 후반에서는 OECD 국가 평균 여성고용률을 상회하다 30대에 평균 밑으로 낮아진다. 이때 결혼·임신·출산·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총선정책으로 띄우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정의당 여성본부는 12월 11일 ‘성평등임금분포공시, 지역에서 전국으로’ 토론회를 열고 성평등 임금공시를 총선정책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지역에서는 조례안을 발의해 서울처럼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배 대표는 “성평등 임금공시제는 문제의 지점을 드러내고 그 심각성을 인지하는 데 유용한 도구”라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다음 단계로서의 문제해결 방안과 연동돼야 한다”고 말했다. 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입법심의관은 “임금을 공시하는 목적은 ‘네 임금을 알고 싶다’가 아니라 왜 설명할 수 없는 격차가 나타나는가, 성차별을 어떻게 시정할 것인가’에 맞춰져야 한다”며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확산하려면) 남녀고용평등법 내 규정을 체계화하거나 별도의 실체법을 구상해 일정 규모 이상 사업주 전체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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