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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화제의 책]교육·종교와 노동…100년 전 여성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공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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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

김소연 지음

효형출판 | 240쪽 | 1만3500원

경향신문

신여성의 요람이었던 최초의 한옥 교사 이화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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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김원주, 김명순, 윤심덕…. 100년 전 신여성들은 여성 해방을 주장하며 뿌리 깊은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편견의 채찍에 맞고 소문의 칼날에 베이며” 미치거나 죽게 됐다. <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의 저자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다른 신여성은 어땠을까?’ 책에선 흑백처럼 나누기 어려운 신여성과 구여성의 구분을 떠나 그 시절을 치열하게 살아간 여성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첫걸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100년 전 여성들에게 새 삶을 열어준 공간들은 크게 세 곳이다. 학교와 교회 그리고 직장이다. 초창기 이들 장소에 드나든 여성들은 지체 높은 양반집 여성이 아니라 제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한 소외된 여성이었다. 가장 변화를 원하고, 변화가 필요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이제까지 주류의 역사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여성들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경향신문

거짓말과 도둑질을 일삼던 꽃님이, 가난한 집안의 딸 박에스더와 여메례, 여종 출신 이그레이스, 소박데기 김마르타, 청상과부 이경숙·차미리사·조신성·정종명·강주룡, 가출소녀 임형선, 구박데기 강경애, 신여성 최은희·허정숙·송계월. 세상에 발을 내디딘 여성들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의사, 전도 부인, 여성운동가, 간호사, 미용사, 교육자, 노동운동가, 기자, 작가, 항일투쟁 운동가로 변신했다.

“우리가 파업을 하는 것은 우리 공장만의 임금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에 이대로 결정되면 얼마 못 가 평양의 2300명 고무 직공 모두에게 영향을 줄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기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닥다리를 대 놓기만 하면 나는 떨어져 죽을 것입니다.” 1931년 5월 평양 평원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강주룡은 20척 높이의 을밀대에 올라 농성을 벌인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최초로 고공 농성을 벌인 ‘체공녀 강주룡’이다. 강주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 강경애와 이어진다. 강경애는 소설 <인간 문제>에서 일제의 동양방직 공장을 모델로 한 ‘대동방적공장’을 배경으로 처절한 노동 현실을 고발했다. 해방 이후 동양방직은 동일방직으로 바뀌었고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의 출발지가 된다.

책에선 공장, 학교, 병원, 백화점, 미용실 등 여성들의 노동 공간을 소환한다. 그곳에는 성희롱에 시달린 백화점의 ‘데파트걸’, 중노동을 견뎌야 한 ‘간호부’, ‘꽃뱀’으로 몰린 미용사들이 있었다. 이들 공간은 오늘날도 여성 노동자들이 세상에 맞서는 최전선이다. 100년 전 여성들의 삶과 공간의 이야기는 그렇게 현재로 이어진다.

‘젠더와 건축’으로 읽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글은 쉽게 풀어냈지만, 담아낸 여성들의 치열한 삶은 결코 가볍지 않다. 글쓴이는 이 글이 “그들의 화려한 성공담은 아니다”라며 그들의 삶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패할지언정 뜻대로 살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루쉰이 단편소설 ‘고향’에 쓴 글을 통해 이 책의 의미를 전한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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