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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아룬다티 로이 “착취당한 자들이여, 눈을 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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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⑩ 아룬다티 로이(1961~)

작고 다양한 것 위해 싸우는 작가

제국과 글로벌 기업이 주무르고

약자 배제하는 자유시장 비판

“세계화할 가치 있는 유일한 건

이의를 제기하는 행동” 역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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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 델리공항으로 오는 인도 하늘은 온통 회색이었다. 내가 그곳에 내린 다음날 수백대의 비행기는 내리지 못했다. 그날 대낮의 델리 시내는 그야말로 가스실이어서 앞을 볼 수 없었다. 여행에서 만난 인도인이 1989년부터 그랬다고 했다. 그때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인도 중심의 제3세계권도 붕괴하고 인도가 미국에 붙은 뒤로 지금까지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과도 사이가 좋아졌고 인도를 사랑하는 한국인도 많아졌지만, 우리가 본 것은 회색 스모그에 가려진 인도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언제나 “눈을 뜨라”고 외치는 아룬다티 로이의 1천쪽이 넘는 따끈따끈한 신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20여년간 쓴 논픽션을 모두 모은 전집으로, 그중 몇개의 글은 번역서로도 이미 읽은 것들이지만 우리에게 소개되지 못한 대부분의 글도 과거에 쓴 것임에도 읽을수록 새롭다. 야간 디지털 조명을 가속화하는 광대역 케이블을 놓기 위해 밤새도록 촛불 밑에서 원시시대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의 묘사로부터 광업 및 수자원 프로젝트를 위한 농촌 토지에 대한 공격적 착취, 핵무기 프로그램의 확대,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및 상업화,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화와 제국주의의 지속, 다양한 형태의 정부 부패 등의 문제를 다루는 그 모든 에세이를 묶는 단 하나의 주제를 말한다면 그것은 착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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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적’이란 비판 두려워 않아



1961년생이니 올해 58살인 로이는 인도 남부 케랄라주의 작은 시골 출신으로 1977년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델리에 올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인도의 전통사회에서 착취당한 사람들을 그린 소설 <작은 것들의 신>(1997)에서 로이는 그곳에서 보낸 소녀 시절을 착취의 악몽이라고 회상했다. 그것은 로이가 두살 때 부모가 이혼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도리어 아버지가 없었기에 로이에게는 종교도, 전통적 속박도, 카스트도, 계급도 없었지만 그것들은 그 뒤로 그녀가 끝없이 싸워야 할 인도였다.

아직도 중매결혼이 대세인 인도에서 페미니스트 어머니에게 “어떤 짓을 해도 좋지만 결혼만은 하지 마라”는 말을 듣고 자란 로이는 화려하게 장식한 신부를 ‘송장 먹는 귀신’이라고 했다. 로이는 건축가 그리고 영화감독과 결혼했지만 모두 오래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20년 만에 쓴 소설 <최고로 행복한 성직자들>에서 그려진,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남녀가 아닌 제3의 성으로 은퇴 뒤 묘지에서 산 사람과 그 반려의 환상적인 삶이 바로 그녀가 꿈꾸는 사랑일까? 500쪽이 넘는 그 소설은 2017년 맨부커상 후보가 되기도 했지만, 카스트나 전문가 등에 반대하는 로이의 본래 목소리를 확인하는 것 외에 소설로서의 재미를 얻지는 못했다.

<작은 것들의 신>도 그 일부가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했지만 그 전에 그가 시나리오를 쓴 풀란 데비를 소재로 한 영화 <밴디트 퀸>이 데비를 부당하게 이용했다는 소송을 당했다. 그 영화와 소설은 한국에서도 소개되었다. 반복적인 강간과 학대 및 인권 침해를 당했음에도 국회에 진출한 데비는 남성의 오락용으로 만들어진 그 영화로 인해 다시 강간당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고, 결국 그녀는 2001년에 암살되었다. 로이가 데비에 대해 과거에 쓴 두 글은 이번 에세이 전집에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 글들로 인해 로이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지만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그녀는 지금까지 견지해온 비판을 계속하고 있다. 가령 댐 건설은 소수민족과 하층 카스트를 제거하는 것이고, 핵실험은 힌두교 민족주의를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작고 다양한 것들을 말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로이는 소설에서 줄곧 다뤘듯이 다양한 세계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려는 거대하고 일원적인 정부나 기업의 지배를 비판한다.

인도 정부가 철저히 반대하는 카슈미르의 독립을 옹호하는 로이의 목소리는 최근 더욱 뜨거워져 매일 뉴스를 탄다. 물론 주류 미디어는 아니다. 인도 정부를 비판하는 그녀에게는 ‘반민족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그녀는 국기는 정부가 처음에는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데 사용하고, 그다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수의로 사용하는 색깔 있는 천 조각일 뿐이라고 풍자한다. 소련식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미국식 시장주의도 극소수의 인간이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독점하도록 허용한 탓에 실패한다고 보는 그녀에게는 ‘반미적’이라는 낙인도 찍혔다. 그러나 로이는 ‘반미’ ‘반조국’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인종주의적 발언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핍이자 기성체제가 제시해준 것 이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지 못하는 무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로이가 비판하는 제국은 미국만이 아니라, ‘자유’라는 깃발 아래 글로벌 기업이 세계의 모든 약자를 ‘자유롭게’ 조작하는 21세기 민주주의 시스템이다. 그것은 선거민주주의라는 가면 아래 의회와 언론과 정부가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괴물이다. 민주주의는 마음대로 입혔다가 벗길 수 있는, 온갖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마음대로 이용해 먹고 버릴 수 있는 자유세계의 장식품이 되었다고 로이는 비판한다. “자유시장이 자유선거와 자유언론과 독립적 사법부를, 최고가를 제시하는 입찰자에게 팔리는 상품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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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정치, 반대의 정치’를!



로이는 자신이 작가나 활동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공적 문제에 관여한다고 말하면서 전문가가 지식을 식민화하고 그 둘레에 장벽을 쳐서 그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로이는 전문가 대 문외한, 또는 지식과 무지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한 가치 체계와 다른 가치체계의 대립, 한 종류의 정치적 본능과 다른 종류의 정치적 본능 사이의 대립이라고 본다. 따라서 지배의 정치가 아닌 새로운 정치인 저항의 정치를 역설한다. 즉 반대의 정치,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정치, 속도를 늦추는 정치, 세계 전역의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명백한 파괴를 막는 정치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세계화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은 이의를 제기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나는 로이의 주장에 대부분 공감하지만 로이가 쓴 에세이 중에서 가장 긴 <박사와 성자: 암베드카르-간디 논의>에서 간디를 카스트주의자로 비판하고 암베드카르를 빈민의 왕으로 내세우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카스트 자체를 부정하고 불교로 개종한 달리트 출신의 암베드카르와 달리 힌두교도인 간디가 차별 없는 직업분화 제도로서의 카스트 유지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두 사람의 주장은 인도의 독립을 위해 서로를 강화한 변증법적 관계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두달 계획으로 간디와 암베드카르의 발자취를 쫓는 인도 여행을 하고 있는 나는 특히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나 작금의 상황과 관련하여 고민하면서 배우고 있다. 여하튼 우리가 세상의 혼란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이 혼란임을, 매우 심각한 혼란임을 깨달아야 하고, 이 세상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로이의 도덕적 분노에 공감한다. 부처도 간디도 암베드카르도 지금 인도든 한반도든 이 땅에 살아 있다면 로이처럼 외치리라. “눈을 뜨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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