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9 (화)

[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미 폭격에 끄떡없던 다리… 7년 만에 신무기에 무너지다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20> 베트남전쟁과 타인호아다리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1967년 9월10일 미국 해군 전투기 A-4E 스카이호크가 북베트남 타인호아 지역의 철로를 폭격하는 장면. 베트남전 초기인 1965년 4월 미군이 공중 폭격으로 북베트남군 병참선을 끊고자 개시한 ‘롤링선더’ 작전은 강한 반격에 막히면서 당초 예정된 4주를 훌쩍 넘겨 3년 넘게 계속됐다. ⓒ위키피디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72년 4월27일, 미국 공군 8전투비행단 소속 F-4 팬텀 전폭기 12기는 태국의 우본공군기지를 이륙했다. 목표는 북베트남의 타인호아다리였다. 남마강을 건너는 타인호아다리는 길이 160m, 폭 17m의 철교였다. 당시 북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즉 현재의 호치민 남쪽으로 120㎞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타인호아다리를 건설한 주체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였다.

1960년대에 미국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공작을 서슴지 않았다. 1961년 4월17일, 1,400명의 무장병력이 탄 여덟 척 배가 쿠바의 피그만에 상륙했다. 다수의 쿠바인으로 구성된 이 부대의 목표는 쿠바 정부의 전복이었다. 외관상 쿠바 반란군으로 포장했지만 이들에 대한 작전을 짜고 훈련시키고 돈을 대준 주체는 미국 정부였다.

1964년 8월 초에는 통킹만에서 작전 중이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와 터너조이가 북베트남 어뢰정으로부터 선제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핑계 삼아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적 개입을 시작했다. 당시의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1995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통킹만 사건이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을 고백했다.

◇폭탄 세례에도 건재한 철교

1965년 4월3일, 미군은 작전명 ‘롤링선더(Rolling Thunder)’를 개시했다. 4주 기간으로 예정된 롤링선더의 목표는 북베트남 내의 병참선을 미국이 자랑하는 항공전력으로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베트남에서 준동하는 북베트남 게릴라, 즉 베트콩의 공세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통상적인 공습목표인 레이더기지, 병영, 무기저장고 외에 수십 곳의 다리와 항구 등을 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4주간의 폭격으로 인해 26곳의 다리가 파괴되었다.

롤링선더의 애초 목표 중 하나였던 타인호아다리도 첫날인 4월3일 공습을 받았다. 46기의 전폭기 F-105 선더치프가 다리를 폭격하고, 21기의 F-100 수퍼세이버가 다리 주변의 대공포대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46기의 선더치프 중 16기는 무선과 조이스틱으로 유도하는 AGM-12 불펍 공대지미사일을 각각 2기씩 장착했다. 탄두의 무게가 약 110㎏인 32기의 불펍은 모두 다리에 명중했지만 다리는 화약에 조금 그을렸을 뿐 멀쩡했다.

미국 공군은 불펍의 폭발력이 충분히 강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다. 나머지 30기의 선더치프는 다른 무기로 무장된 이유였다. 각 기체는 불펍 탄두의 세 배에 달하는 약 340㎏짜리 폭탄을 8개씩 장착했다. 첫 번째 폭격은 강한 남서풍 때문에 빗나갔지만 이어진 폭격은 다리 상판의 철로와 그 위의 하중을 지탱하는 상부구조물에 명중했다. 그러나 다리는 건재했다. 공습의 효과는 그저 몇 시간 동안 다리 위 통행이 중단된 게 전부였다.

미군의 자존심을 긁는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요격 임무로 출격한 북베트남 공군의 미그-17과 미국 해군 항공모함 행콕에서 출격한 F-8 크루세이더가 공중전을 벌인 결과 각각 1기씩 격추되었다. 초음속 전투기인 데다가 공대공미사일 사이드와인더로 무장한 크루세이더가 아음속이면서 23㎜ 기관포 밖에 없는 미그-17에게 먼저 격추됐다는 사실은 미군에게 충격이었다. 미군은 북베트남군의 대공포대에 의해서도 3기의 항공기를 잃었다. 북베트남군은 타인호아다리 주변에 5개의 방공연대를 배치해두었다.

다음날인 4월4일, 미군은 재차 공습에 나섰다. 오직 340㎏ 폭탄만 매달고 온 48기의 선더치프는 연달아 타인호아다리를 맹폭했다. 베트남인들은 이 다리를 함롱다리라고 불렀다. 함롱은 베트남말로 ‘용의 턱’을 뜻했다. 용의 턱은 그대로였다. 게다가 4기의 미그-17은 제공 임무를 맡은 21기의 F-100 수퍼세이버의 엄호를 뚫고 선더치프 편대를 덮쳤다. 2기의 선더치프가 추락했고 조종사도 모두 죽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5기의 미군 항공기가 북베트남군의 대공포에 의해 격추됐다. 북베트남군은 이날 3기의 미그-17을 잃었다.

◇3년 넘는 파괴 공작도 허사

군사 테크놀로지는 전쟁과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전쟁이 군사 테크놀로지에 의해 좌우됨은 역사적으로 자명했다. 일례로, 기원전 12세기의 아시리아는 철제 무기로 주변의 청동기 세력을 제압하고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스의 불’이라 불린 극비의 인화성물질을 해전에 활용한 동로마는 서로마가 멸망된 후에도 약 1,000년간 제국을 영위했다. 화약과 총포의 개발은 기병 귀족의 권력을 무력화시켰다.

경제가 군사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관계는 전쟁보다는 불분명했다. 공격무기 개발이 기술적 파급효과와 광범위한 생산성 증가를 가져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또한 무기 생산으로 인한 국내총생산의 증가는 인력과 자원의 기회비용 손실, 구축효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비하면 사소한 기여에 가까웠다.

반면 직접적인 파괴와 무관한 방어적 군사 테크놀로지는 예기치 않은 영역에서 민수산업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예를 들어, 소련의 핵공격시에도 군사용 통신을 유지하기 위한 아르파넷은 현재의 인터넷산업의 모체가 되었다. 또, 애초에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은 1983년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를 계기로 민간에게 개방되었다.

통상적인 폭격이 소용이 없자 미국 공군은 혁신적인 방법도 시도했다. 1966년 5월에 수행된 작전명 ‘캐롤라이나 달’은 자기장센서를 장착한 대형 기뢰를 남마강에 투하하는 작전이었다. 기뢰가 타인호아다리의 철제구조물을 감지해 다리 바로 밑에서 터지면 무너트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대형 기뢰 투하가 가능한 유일한 수송기 C-130 허큘리스는 5월30일, 5발의 기뢰를 투하했다. 그 중 4발이 다리 밑에서 터졌지만 소용없었다. 다음날 다시 기뢰를 떨어트리러 온 허큘리스는 대공포에 격추돼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허큘리스를 호위하던 최신예 전폭기 F-4 팬텀 1기도 덩달아 격추됐다.

미국 해군도 타인호아다리를 대상으로 1968년까지 폭격을 계속했다. A-4 스카이호크나 A-6 인트루더와 같은 공격기는 물론이고 팬텀도 공격에 가담했다. 특히 미국 해군은 ‘발사 후 망각’이 가능한 텔레비전유도 공대지미사일 AGM-62 월아이를 투입해 다리의 파괴를 꾀했다. 1967년 450㎏ 탄두를 단 월아이는 타인호아다리에 정확히 명중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결국 신무기에 주저앉은 ‘용의 턱’

애당초 4주간 폭격으로 계획됐던 롤링선더는 1968년 10월까지 3년 넘게 계속됐다. 롤링선더로 인해 미국 공군, 해군, 해병대는 각각 506기, 397기, 17기의 항공기를 잃었다. 피해가 큰 작전의 지속이 그 해의 대통령 선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두려웠던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1968년 11월1일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을 전면 중단했다. 결국 존슨은 불출마했고 존슨 대신 민주당 후보가 된 휴버트 험프리는 낙선했다.

3년 넘게 미군의 폭격을 쉬었던 타인호아다리는 1972년 4월에 다시 폭탄을 맞았다. 1972년 3월30일, 북베트남군은 미국 대통령 선거의 해를 맞이해 압박을 가할 목적으로 일명 ‘부활절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자 반전보다는 강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원했던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북베트남 폭격을 재개하는 작전명 ‘라인배커’를 승인했다.

4월27일, 태국 우본공군기지를 이륙한 12기의 팬텀 중 호위 임무를 맡은 4기를 제외한 나머지 8기는 새롭게 개발된 두 가지 무기를 장착했다. 한 가지는 레이저로 유도되는 900㎏ 탄두의 페이브웨이였고, 다른 한 가지는 월아이의 탄두 중량을 900㎏으로 늘린 이른바 ‘월아이 II’였다. 잔뜩 낀 구름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던 페이브웨이 대신 월아이 II가 발사됐다. 5발의 월아이 II에 직격된 타인호아다리는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일부가 뒤틀렸다. 고무된 미군은 5월13일, 2차 공습을 가했다. 14기의 팬텀 편대는 1,400㎏과 900㎏짜리 페이브웨이를 명중시켰다. 결국 타인호아다리는 꺾여서 부러졌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한국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