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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년간 공존·화합… 고대 왕국 가야를 들여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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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특별전 / 동남아 가옥 본따 만든 상형토기 눈길 / 김해 신문리서 日 생활용기 다량 출토 / 왜인 집단 지속적으로 이주 알 수 있어 / 북방·호남까지 아우르며 수백년 존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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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가야본성-칼과 현’ 특별전 언론공개회 참석자들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48년 7월, 아유타국(고대 인도의 한 나라로 추정)의 허황옥은 김해 앞의 망산도에 도착했다. 가야국의 수로를 배필로 정해놓았으니 결혼을 하라는 황천상제(皇天上帝)의 말에 따라 멀고 거친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이다. 김해시 구산동 수로왕비릉에는 이런 건국신화를 품은 ‘파사석탑’이 전한다. 허황옥이 무서운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배에 실었다는 탑이다. 탑의 돌은 마그마 활동이 남긴 산화철 광물이 포함된 석영질 사암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니 신화 속 허황옥의 여정이 그저 꾸며낸 이야기만은 아닌 듯도 싶은 감상을 일으킨다.

김수로와 허황옥의 ‘국제결혼’이 보여주듯 가야의 역사는 다문화와 그것의 공존으로부터 시작됐다. 가락국(금관가야), 아라국(아라가야), 가라국(대가야), 고자국(소가야), 비사벌국(비화가야), 다라국 등이 ‘가야’라는 큰 틀에서 각자의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며 어울려 살았다. 가야의 시간은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기까지 무려 520여 년. 이처럼 긴 시간을 존재했던 가야의 역사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건 공존을 근간으로 한 가야가 중앙집권적 통합을 추구한 삼국에 눌려 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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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모양을 한 상형토기는 가야 토기 제작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의 집과 배 등 생활의 단면을 전한다. 사진은 경북 고령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가야의 금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일 개막식을 가진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본성-칼과 현’ 특별전은 가야사를 관통하는 공존과 화합의 가치에 주목한다. 통합을 이루지 못한 작은 나라가 아니라 오늘날 의미가 더욱 큰 “다양성이 공존한 평화의 모습”을 추구한 고대의 왕국이었다는 것이다.

◆동남아 가옥의 형태를 취한 가야의 상형토기

토기는 “비슷한 형태의 토기들이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져” 가야의 다채로움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대표적인 기형인 굽다리접시만 보더라도 가락국의 것은 바깥으로 벌어진 입을 가졌고, 아라국의 것은 불꽃무늬 구멍 장식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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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모양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가야의 토기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상형토기인데 여기에는 가야를 구성했던 다문화적 요소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라국의 도읍이었던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에서 최근 사슴을 형상화한 뿔잔, 바다를 항해하는 배모양 토제품 등이 출토되었는데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지은 모양의 토기도 그중 하나다. 박물관은 “이런 형태는 습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방지해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한 형태”라며 “동남아시아 등 남방의 더운 지역에서 주로 만들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야와 활발한 교류를 했던 고대 일본의 흔적들도 확인할 수 있다. 경남 김해의 여러 유적에서는 왜계 토기가 자주 발굴돼 왜인들이 지속적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신문리 유적에서는 생활용기인 ‘하지키’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왜인 집단의 존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추운 북방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진 후 문화 교류로 남하하여 가야에 전해진 ‘이동식 부뚜막’, 김해 예안리고분군 12호묘와 41호묘에 각각 나온 북방계 인골, 남방계 인골 등이 가야를 지탱했던 다양한 문화의 면모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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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모양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호남 일대까지 아울렀던 가야

5세기 남진정책을 추진한 고구려가 강한 압박을 가해오자 백제, 신라는 북쪽을 경계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가라국은 이런 틈을 노려 낙동강에서 섬진강에 이르는 여러 지역을 규합했다. 지금의 호남동부지역을 세력권 내로 아우른 것이다. 최근 가야 관련 발굴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전북 남원 두락리 4호묘에서 출토된 ‘고리자루 큰칼’은 ‘기문’이라는 나라에 미친 가야의 영향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5세기 기문에는 고자국의 문물이, 6세기 초에 이르면 가라국의 귀걸이와 큰칼, 토기 등이 유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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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탄 무사모양 뿔잔.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박물관은 “기문은 남원 월산리, 두락리 고분의 발견으로 운봉고원 일대에 자리를 잡았던 세력으로 추정된다”며 “6세기 이후에는 고구려 남하로 한강 유역을 빼앗겼던 백제가 세력을 회복하면서 가라국과 백제가 다투는 지역이 되었다”고 밝혔다.

전남 순천의 운평리고분은 지금의 여수, 순천, 광양으로 비정되는 ‘임나 4현’이 가라국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운평리 M2호묘’는 이 지역 최고 지배자의 무덤이며, 가라국과 관련되는 위세품과 토기류가 확인됐다. 이 고분에서는 원통모양 그릇받침, 금귀걸이 등이 나왔다.

박물관 배기동 관장은 “여러 나라가 각축하던 삼국시대는 통합을 원했으나 공존의 왕국 가야는 통합을 추구한 나라들에 굴하지 않았다”며 “작은 것이 강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뭉쳤기 때문이며,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의 집약체인 철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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