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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내가 푼 중간고사 문제, 교수가 안 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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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조해람 기자] [대학원생 조교에 '대리 출제' 관행 여전…"매뉴얼 확립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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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이지혜 디자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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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에게 대학 학부 시험 문제 출제를 시키는 관행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교수의 갑질에 대학원생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학부생들의 '정당하게 평가받을 권리'도 위태롭다.


"나 바쁘니까 조교가 출제 좀 해" 뻔뻔한 교수들

머니투데이가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과 함께 온·오프라인으로 사례를 수집한 결과, 대학원생에게 학부 시험 문제 출제는 물론 시험 채점·불만 응대 등 후속 조치까지 시키는 관행이 여전히 존재했다.

서울 한 대학 자연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한 A씨(29)는 지난해 인문계 학생들을 위한 과학 교양 강의에서 두 차례 시험문제를 출제했다. A씨는 "지난해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교수가 바쁘다며 문제를 출제해 달라 했다"며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문제와 EBS 교재를 풀면서 출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A씨는 기말고사 때도 시험문제를 출제했다.

A씨는 시험 직전 질문을 받는 강의도 교수 대신 진행했다. 채점과 클레임 처리, 성적 공개 등 후속 업무도 도맡았다. A씨는 "최소한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을 평가하는 건 교수의 의무 아닌가. 시험 출제하고 성적 매기라고 교수한테 인건비를 주는 건데, 아래로 책임을 전가하니 기분이 나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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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18일 제주대학교 본관 앞 잔디밭에서 제주대 멀티미디어디자인전공 4학년 학생들이 A교수로부터 갑질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A교수의 파면을 촉구하고 있다./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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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계열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 다른 대학 경영학 대학원 석사를 마친 B씨(29)는 2년 동안 학부 전공과목 시험 문제를 출제했다. 이른바 '족보(기출문제 모음)'를 출판사로부터 넘겨 받아 내용을 조금씩 바꿔가며 문제를 냈다. B씨는 "만점자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문제 난도도 조절해야 했다"고 고발했다.

대리 출제는 대학원생들의 노동권 문제는 물론, 학부생의 '평가받을 권리'도 침해한다. 서울의 한 대학 인문대 학부생 윤모씨(22)는 본인이 푼 시험 문제를 대학원생이 냈다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기분 나쁘다. 정당하게 평가받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것"이라며 "교수마다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강의시간에 강조하기도 하는데,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이 문제를 낸다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규정도, 말할 곳도, 챙겨주는 이도 없다

문제는 대학원생의 업무 범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조교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고등교육법 제15조 4항에 나온 "교육·연구 및 학사에 관한 사무 보조" 한 줄이 전부다. 조교의 처우는 사실상 각 대학의 자체 규정에 달려 있지만, 학교 규정도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업무를 폭넓게 규정하다 보니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의 구분이 흐리다.

학계에서 철저히 '을'인 대학원생의 지위도 문제다. 대학원생은 교수에게 부당한 일을 당해도 고발하기 어렵다. A씨는 "학계가 워낙 좁고 미래도 불분명하다 보니 대학원생은 교수에게 항의할 수 없다"며 "인권센터도 교수들이 보직을 맡고 있으니 말할 창구가 없다"고 털어놨다. B씨는 "나는 졸업했지만 아직 학교에 있는 이들은 어디 얘기도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인터뷰 하나 잘못하면 청춘이 다 날아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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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전국대학원총학생협의회가 2017년 11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대학원생 조교 노동권 보장에 따른 교육부 대책 촉구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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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욱 대학원생노조 사무국장은 "조교 업무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학교마다, 교수마다 다르다 보니 조교를 비서처럼 부리는 교수도 나오는 것"이라며 "시키는 것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불합리한 지시를 어떻게 거부해야 하는지, 고충을 말할 제도적 공간이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대학원생이 먼저 부조리를 고발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 사무국장은 "당장은 교육부 차원에서 실태조사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아직까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며 "조교의 노동자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조해람 기자 doit92@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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