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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핵에는 핵’…한·미 핵공유론에 힘 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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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공유 협정 체결은 북핵 위협을 실효적으로 억제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김정은에게 핵을 보유해봐야 쓸모없고 북한 체제만

불안정해진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수면 위로 부상 중인 ‘북핵 플랜B’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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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당시 미 공군 유럽ㆍ아프리카 사령관인 로저 브래들리 공군 대장이 네덜란트의 볼켈 공군기지에서 열린 B61 전술 핵탄두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미국은 독일과 네덜란드 등 나토 5개국과 핵공유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유사시 미국과 합의하면 나토 5개국도 이 핵탄두들을 사용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미국과 핵공유협정을 체결해 북핵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의견이 늘어나고 있다. [사진 미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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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파리를 지키려고 뉴욕을 포기할까.”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샤를 드골이 1957년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소련이 프랑스를 공격할 때 미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해 프랑스를 지켜주지 않을 가능성을 드골은 우려했다. 미국의 핵우산을 신뢰하지 못한 프랑스는 비밀리에 진행 중이던 핵개발을 가속해 독자 핵무장의 길로 나아갔다.

지금 일부의 한국인들이 60여 년 전 드골과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들은 드골의 발언에서 파리를 서울로, 뉴욕을 로스앤젤레스(LA)로 대치한다. 2017년 북한이 개발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의 사거리가 미국 서해안에 이른다는 사실이 시험발사로 입증됐기 때문에 그런 질문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동맹은 쉽다(Alliance is easy)”고 말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도 그런 사람의 숫자를 늘어나게 했다. LA를 괌이나 하와이로 바꿔도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핵우산을 100% 신뢰할 수 없다는 일부 한국인들의 결론은 드골이 그랬던 것처럼 핵무장론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독자 핵무장론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존재했다. 원조는 비밀리에 독자 핵개발을 추진하다 미국에 제지당해 꿈을 접어야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지금도 여전히 독자 핵개발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되고 사실상 핵무장을 완성한 상황이라 핵무장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정몽준 한나라당 전 대표가 대표적이고, 원자핵공학자인 서균렬 서울대 교수도 그런 주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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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핵개발론자인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한국도 3개월이면 플루토늄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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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연구실에서 만난 서 교수는 “시험용 플루토늄탄 완성에 3개월, 실전용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 1개씩을 완성하는 데 6개월이면 된다. 첫 핵탄두를 만드는데 1조원이 들고 그 이후로는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어든다”고 말했다. “미국이 첫 원자탄을 만들 때보다, 혹은 인도·파키스탄·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을 때보다 현재 한국의 원자력 기술과 경제력이 훨씬 높기 때문에 결심만 하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그는 덧붙였다. 미국과학자연맹(FAS) 회장을 지낸 찰스 퍼거슨은 2015년 작성한 보고서에서 “중수로형인 월성 원전 1∼4호기의 수조에 보관된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면 4330개의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독자 핵개발을 막는 장애는 기술 외적 요인이다. 독자 핵개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탈퇴와 이에 따른 유엔 제재를 동반하게 돼 있다. 무역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한국 경제 구조로 볼 때, 핵개발은 경제 파탄으로 이어지는 자멸의 길이란 반대론이 여전히 여론의 주류다. 서 교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이나 미 중앙정보국(CIA) 소속 요원들이 내 연구실에 찾아와 이것저것 조사를 하고 간 적이 몇 차례 있다”고 말했다. 국제사회가 얼마나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전히 독자적 핵개발론은 소수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핵개발의 대가로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대신 야권이나 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현실성 있는 방안으로 거론되는 것은 핵공유론이다. 올 2월 하노이 노딜(No Deal)에 이어 10월 스톡홀롬에서의 북·미 실무협상까지 노딜로 끝난 것을 보면서 궁극적으로 비핵화 협상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플랜 B’를 준비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9월 27일 국회 대정부질문이 그 상징적인 사례다. 원유철 의원(자유한국당)은 “북·미 회담이 결렬되거나 북핵이 폐기가 아닌 동결로 가는 경우 한반도 비핵화 회담은 실패한 것”이라며 “한반도 비핵화 회담 실패 시 한미연합사가 핵을 보유하는 한국형 핵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종의 ‘한·미 핵공유론’인 셈이다. 예비역 장성인 김중로 의원(바른미래당)도 “비핵화는 이미 물 건너갔다. (이대로 가면)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핵 동결로 가게 된다. 원유철 의원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고 말했다.

핵 공유는 나토(NATO) 방식을 모델로 한다. 핵무기 사용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미국이 갖지만 관리 운용에 대한 전략을 한국과 미국이 공유하고 훈련도 함께 하는 방식이다. 현재 독일·이탈리아 등 나토 회원국 중 비핵국가 5개국에 180기의 핵무기가 배치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국가는 핵 저장고의 열쇠까지 미국과 공유한다. 류제승 전 국방부 정책실장은 “핵무기가 영토 안에 배치돼 있지 않은 나머지 20개 국가도 미국의 핵 정책 및 운용 협의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핵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며 “우리도 핵공유 태세 강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이따금 거론되는 전술핵 재배치도 크게 보면 핵공유론의 범주에 들어간다. 1991년 미국은 한국 영토에 배치했던 전술핵을 모두 철수했는데 현재까지 폐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재반입해 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지난달 발표한 외교안보 정책비전인 민평론(국민중심 평화론)에서 ‘한·미 핵공유협정’ 체결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원유철 의원 등 소수가 주장해 온 핵공유론이 당론으로 격상된 것이다. 안보 전략가들 사이에서도 핵공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류 전 실장은 “핵공유 협정 체결은 북핵 위협을 실효적으로 억제하는 유일한 대안”이라며 “김정은에게 핵을 보유해봐야 쓸모없고 북한 체제만 불안정해진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 형식의 핵무장에도 반대하는 정부 방침은 확고하다. 대화·협상을 통한 비핵화만이 유일 해법이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방미를 앞두고 이뤄진 CNN과의 인터뷰에서 “북핵에 대응해 자체적으로 핵개발을 하거나 전술핵을 다시 반입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북한 핵에 우리도 핵으로 맞서겠다는 자세로 대응하면 남북 간에 평화가 유지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 방침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북한의 핵능력이 완성단계에 가까워질수록 협상을 통한 북한 비핵화의 성공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며, 그에 비례해 한국의 독자 핵무장 목소리가 더 높아질 것이란 점이다. 비핵화를 위한 대화와 협상은 끝까지 추진하는 동시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플랜B’를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 취급, 이제는 동조자 크게 늘어”

원조 핵무장론 정치인 원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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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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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북핵외교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원유철 의원은 한국도 핵무장을 통해 ‘공포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가장 확실한 북핵 대응책이라고 주장해 온 인물이다. 5선 의원인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핵무장론을 얘기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당했지만 지금은 동조하는 정치인이 늘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오후 의원회관에서 원 의원을 만났다.

Q : 핵무장 지론을 갖게 된 계기는.

A : “2010년 18대 국회 국방위원장을 할 때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다. 현장에 가서 민가가 포격 당한 것을 보고 핵을 가진 김정은 정권이 앞으로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핵무장론은 별 게 아니라 상식에 입각한 것이다. 총을 가지고 덤벼드는 상대방을 칼로서 제압할 수 있겠나. ‘핵에는 핵’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북한이 핵을 내려놓을 때까지 우리도 핵전력을 갖자는 조건부이자 시한부 무장론이다.”

Q : 9년 전 핵무장론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금기에 가깝지 않았나.

A : “최근까지도 그랬다. 2016년 원내대표를 맡아 교섭단체 대표연설 하기 하루 전날 핵무장론을 원고에 내가 직접 써넣었다. 그랬더니 청와대 현기환 정무수석이 그 내용을 빼는 게 좋겠다고 전화를 걸어왔고 당일 아침에도 확인 전화가 왔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원고에서 뺐는데 실제 연설할 때는 결국 그 부분을 되살려 발언을 했다.”

Q : 원 의원 주장에 동조하는 정치인이 어느 정도 되나.

A : “서너명의 의원을 규합해서 당내에 ‘핵포럼’을 만들었다. 지금은 회원 수가 30명으로 늘었다. 여당 내에서도 김부겸 의원 같은 분들이 상임위에서 내 의견과 비슷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북핵 위협을 피부로 느낀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정부도 입장을 바꿔 적극적으로 플랜B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당 정치인 중에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원 의원과 의견을 같이하는 정치인들이 드물지 않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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