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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38] ‘철인 황제’ 아우렐리우스도 자식 교육은 어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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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콘세르바토리 박물관]

- 준비된 통치자 아우렐리우스

인품·능력 탁월, 황제 사위 낙점… 황제 즉위 뒤 기근·홍수 덮쳐… 잇따른 외세의 침공 잘 막아내

- 황제는 전쟁터에서 격무로 숨지고

19세 아들 콤모두스가 황제 승계… 누나가 보낸 자객의 암살 시도 뒤 간신들의 부추김에 광기 분출

- “로마의 헤라클레스” 아부에 넘어가

황제가 검투사로 735회나 싸워… 시민들 분노 극에 달했을 때 측근들에 의해 살해당해

조선일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중심에 거대한 왕궁 단지가 있다. 호프부르크(Hofburg)다. 왕궁 안에서 구(舊)도심을 향해 나아가면 미카엘 광장이다. 사방이 오랜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어 크지는 않다. 다만 광장 한가운데 발굴하다 만 로마 유적이 특이하다. 유적은 한때 빈이 로마제국의 변경을 지키는 군사 도시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참 로마제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빈에서도 마찬가지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도(皇都)였고,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이 도시의 건설자가 로마라니! 로마제국은 유럽에서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국경선으로 삼았다. 문명과 야만을 가로지르는 날 선 경계에 세워진 군사 도시. 이곳을 중심으로 오랜 세월, 선을 넘고자 하는 이들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격돌했다. 그 투쟁이 한창이던 180년 3월, 당시 ‘빈도보나’라 불렸던 빈에서 위대한 한 로마인이 숨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년). 오현제의 마지막으로 철인(哲人) 황제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빈의 3월은 춥다. 왜 그 추운 계절에, 당시에는 황량하기 그지없었을 변방의 군사 도시에서 귀한 로마제국의 황제가 생을 마감한 것일까?

철인 황제의 힘겨운 통치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61년 3월, 선황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오현제의 4번째에 해당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전임자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가 이뤄놓은 대외 원정과 대내 개혁의 결과에 운까지 따랐기 때문이다. 국경선은 잠잠했고, 천재지변도 없었다. 안정 속에 번영이 꽃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전임자들과 달리 23년이란 긴 치세의 대부분을 로마에 머물면서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런 황제의 사위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친가는 명문이었고, 외가는 부자였다. 타고난 좋은 성품에 어머니의 헌신적인 교육까지 더해져 또래 젊은이 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황제가 사위로 탐낼 만했다.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준비된' 통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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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 남긴 유일한 황제의 청동 기마상의 주인공은 철인 황제라 불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의미 있는 삶인지를 오랜 세월 고민한 탓일까? 황제임에도 그의 복장은 담백하고 표정은 인자하다. 캄피돌리오 광장(왼쪽 사진)에 서 있는 기마상은 복제품이고 진품(오른쪽 사진)은 바로 옆 콘세르바토리 박물관에 소장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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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는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로마와 이탈리아에 기근과 홍수가 닥쳤다. 동방에서는 전쟁이 터졌다. 오랜 라이벌인 파르티아가 제위 교체기를 틈타 완충 국가인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것이다. 로마제국 입장에서는 묵과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로마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파르티아 전쟁(161~166년)이 본격화됐다. 전쟁은 로마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신임 황제 입장에서는 시험대를 통과한 셈이었다. 그러나 위기는 계속됐다. 페스트가 제국을 덮쳤고, 도나우강 전선에 전운이 감돌았다. 트라야누스가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를 정복하고, 하드리아누스가 방위선을 재정비한 이래 유지됐던 평화에 금이 간 이유는 게르만 부족들의 침략 때문이었다.

황제는 직접 전선으로 갔다. 전쟁은 장기화됐다. 로마군이 대부분 승리했지만, 게르만 부족들도 녹록지는 않았다. 황제는 대부분의 시간을 전선에서 보냈다. 그렇다고 로마의 일을 대강 처리하지도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공정'이란 가치를 중시하고, 책임감이 강한 황제는 스스로를 격무로 내몰았다. 건강을 타고나지 못한 황제에게 이런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황제의 최후는 게르만 부족들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가 가시적인 효과를 내던 순간에 찾아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숨졌다. 180년 3월 17일이었다. 로마제국은 그다음 날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몰락이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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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로의 권력 승계는 순조로웠다. 열아홉 살의 청년에게는 아버지를 비롯한 선대 황제들의 아우라만 찬란했을 뿐, 미래의 폭군을 암시하는 징조는 없었다. 콤모두스는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로마로 돌아왔다. 제국의 수도에는 젊은 최고 권력자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고, 콤모두스는 인생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자객이 원형경기장에서 궁으로 돌아오던 황제를 노렸다(183년). '너에게 보내는 원로원의 칼이다'란 외침과 함께. 암살은 실패했고 자객은 체포됐다. 배후는 금방 밝혀졌다. 황제의 큰누나 루킬라(Lucilla)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 황제를 맡았다가 요절한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130~169년)의 미망인이기도 했다. 제국 내에서 가장 지체 높았던 루킬라는 콤모두스의 아내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남동생을 살해하려 했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낯설지는 않다. 원래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언제나 상식의 선을 가볍게 넘어서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누나의 암살 음모가 콤모두스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광기를 깨웠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권좌와 목숨을 노릴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는 의심과 증오의 자양분이 됐다. 죄 없는 원로원의 중진들이 일차 타깃이 됐다. 자객이 '원로원의 칼'이라 외친 때문이었다. 혐의가 곧 증거였고, 재판 결과는 유죄로 정해져 있었다. 황제가 피 맛을 본 야수처럼 날뛰자 주변으로 간신들이 몰렸다. 그들은 황제의 의심을 불쏘시개 삼아 권력을 사유화하고 축재(蓄財)했다. 정의의 실종, 도덕의 희화화가 일상화됐다. 공정과 윤리를 누구보다 중시했던 철인(哲人) 황제의 아들에 이르러 펼쳐진 이 비루한 풍광을 로마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러나 쇼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어려서부터 콤모두스는 무술과 사냥에 능했다. 간신들은 '로마의 헤라클레스'라 칭송했다. 아부에 취한 어리석은 군주는 한발 더 나아갔다. 시민들에게 자신의 힘과 무예를 과시하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콜로세움에 선 것이다. 경기를 주최하는 황제로서가 아니라 검투사로! 황제가 챙겨야 할 것은 국정(國政)이고, 서 있어야 할 곳은 전선(戰線)이어야 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랬다. 아들 콤모두스는 주변 간신들만 챙기더니 비천한 검투사로 분장해 경기장에 섰다. 황제는 735회나 싸웠다. 황제의 업적은 제국의 공식 행사 기록으로 정중히 게재됐고, 황제는 검투사들의 공동 기금에서 상당한 거액의 수당마저 챙겼다(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시민들의 수치심과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황제의 잔혹한 변덕이 자신들을 향할 것을 두려워한 측근들이 콤모두스를 살해했다(192년 12월 31일). 언제나 그러하듯 폭군의 최후는 허망했다.

한 공간의 아버지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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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콤모두스의 반신상. 마치 헤라클레스처럼 사자 가죽을 뒤집어썼고 어깨에는 몽둥이를 둘렀다.


로마의 한가운데 카피톨리노 언덕(Mons Capitolino)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로마 황제의 기마상 중 유일하게 남은 귀한 조각이다. 복제품이다. 진품은 광장의 콘세르바토리(Conservatori) 박물관에 있다. 고대 로마 예술의 보고(寶庫)다. 이곳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의 가치는 압도적이다. 그 위상에 걸맞게 로마제국의 주신(主神) 유피테르 신전 터에 신축된 유리 홀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황제의 표정은 다정하고, 복장은 소박하다. 앞으로 내민 오른손은 신민에 대한 자비를, 움켜쥔 왼손은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뜻하는 듯하다. 바로 옆 복도에는 또 하나의 인상적인 대리석 흉상이 있다. 머리에는 사자 가죽을 뒤집어썼고, 오른손은 투박한 곤봉을 들었다. 헤라클레스다. 아니 헤라클레스처럼 꾸민 콤모두스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처럼 한 공간에 있지만, 삶과 평가가 달랐던 만큼이나 남겨진 모습도 다르다. 허약했지만 철학을 사랑하며 묵묵히 황제의 역할에 충실했던 아버지. 육체는 건강했지만 나약한 정신으로 의심과 증오,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광대처럼 살았던 아들. 이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부자(父子)가 또 있을까? 역시 자식 교육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철인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제들에게 嫡子 없었기 때문에 오현제 이어져]

'역사상 인류가 가장 큰 행복과 번영을 누린 시기는 언제일까?' 누구나 던져봄 직하지만, 누구도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기번(1737~1794년)은 이 질문에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콤모두스가 즉위하기까지의 기간'이라고 답했다.

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재위기에 해당하는 시기로(96~180년) 이른바 '오현제 시대'이다. 광대한 로마 제국은 덕과 지혜가 넘치는 권력의 통치를 받았고, 군대는 단호하면서도 온후한 황제들이 장악했다.

‘부자가 삼대를 못 간다’는 말은 권력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탁월한 왕이 연이어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현제 시대는 어떻게 그 한계를 극복했을까? 황제들이 이미 재능과 성품을 인정받은 사람을 사위로 삼거나 양자로 삼아 물려줬기 때문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계승이 가능했던 이유는 황제들에게 적자(嫡子)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현제 시대는 결국 다섯 황제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적자 콤모두스를 남기는 바람에 중단됐다.

[빈·로마=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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