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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공감세상] 이념에서 실험으로 / 김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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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박정희의 삶을 추적한 강의에, 도올은 ‘이념의 종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남로당 하부조직책으로 일하던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으로 남로당 조직을 모두 실토하고 풀려난다. 한때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이후 강력한 국가주의를 내세워 남한의 대통령이 된다. 20세기는 이념의 세기였고, 한반도는 그 수입된 이념의 격전장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수입된 이념들은 좀처럼 체화되지 못한 채 나라를 둘로 가르고, 그 갈라진 나라를 또 둘로 갈랐다.

이념은 중요하다. 인간은 믿지 않고서는 행동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념은 강력하다. 이념은 쉽게 종교가 된다. 이념은 희망의 씨앗이다. 이념은 현실을 부정하며, 새로운 세계의 환상을 제공한다. 이념은 체계적인 이론으로 구성돼 있다. 이념이란 결국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이상화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념의 기초가 되는 파편은 시대가 품고 있지만, 그걸 포착하고 체계화하는 건 지식인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이념은 지식인이 만든다. 이념은 이상주의자인 지식인의 작품이다. 20세기가 이념의 격전장이었고 그 이념의 투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그 책임의 절반은 지식인에게 있다. 그들이 이념을 직조하고 교조화하고 퍼뜨렸기 때문이다.

다시 촛불이 켜졌고, 태극기도 거리를 가득 메웠다. 마치 다시 20세기로 회귀한 듯, 한국은 몇달간 이념의 전장터가 됐다. 이념의 투쟁에 지식인은 필수 요소다. 철학자 이진우는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는 글로 참여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을 파시즘의 씨앗으로 비하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박노자는 광장에 나온 시민이 자신의 계급 문제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비판했고, 진중권은 서초동 촛불에 대해 “중우정치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조국 사태는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오래된 지식인들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이념은 여전히 87년에 멈춰 있고, 그 이후를 말하는 지식인은 없다.

완벽한 이론은 없다. 모든 이론은 특별한 조건에서만 잘 작동하는 체계일 뿐이다. 자연과학은 이미 수백년 전에 이론의 불완전함을 인정한 학문체계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학문체계인 자연과학은 17세기 근대과학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모든 학문체계에 영향을 미쳤다. 바로 그 시기에, 뉴턴은 이론과 이론이 지루하게 논쟁을 일삼던 과학의 공간에, 실험이라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도입했다. 이론은 실험 결과에 굴복해야 한다. 실험이 이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이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과학이 승리한 비결이다.

이념은 폐쇄적인 지식인의 사고 속에서만 작동하는 이론체계다. 그 이론은 반드시 실험의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지식인의 이념은 실험으로 증명된 적이 없다. 그들은 여전히 제 머릿속에서만 완벽한 그 이론체계를 현실에 투사하며, 현실이 자신의 머릿속과 다르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 구차한 이론조차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수입한 이론이 한국 사회를 잘 설명할 리 없다. 87년 체제의 모든 이념은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한국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론들이 단 한번도 실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에 등장했던 지식인들은 바로 그 실패를 상징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모두가 87년 체제 이후를 이야기하지만, 다들 그 체제의 이념이 무엇일지만 고민한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건, 더 나은 이념이 아니라 더 많은 실험이다. 공수처를 설치해봐야 한다. 특수부를 없애봐야 한다. 기본소득을 실시해봐야 한다. 공유경제를 위해 규제를 과감히 없애봐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중책을 맡겨봐야 한다. 이미 무상급식이라는 실험으로 한국 사회는 변화했다. 더 많은 실험이 필요한데, 모두 자신이 옳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바꾸려면 모두가 실험의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 사회를 실험해야 한다. 그리고 실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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