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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유레카] 경도법과 노벨상 / 구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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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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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10월22일 영국 해군 1647명이 항해 도중 몰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해 지브롤터해협에서 프랑스와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영국 남부의 군항 포츠머스로 귀환하던 중이었다. 며칠째 계속된 짙은 안개로 항로를 잃은 함대가 영국 서남단 실리제도에 부딪혀 침몰했다. 21척의 함대 중 4척의 배가 몇분 간격으로 수장됐다. 참사 원인은 경도 계산 실패였다.

항해에서 위치 파악은 위도와 경도를 통해 하지만, 18세기 초만 해도 해상에서 경도 측정 방법이 없었다. 위도는 태양 위치로 쉽게 알 수 있지만, 경도는 달랐다. 참사를 계기로 영국 의회는 1714년 경도법을 제정했다. 바다에서 경도 측정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2만파운드(현재 수십억원 상당)의 상금을 주기로 한 법이다. 갈릴레이, 뉴턴도 뛰어들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달과의 거리로 측정하는 월거법 등 다양한 방법이 시도됐지만, 예상을 깨고 무명의 시계기술자 존 해리슨이 상금의 주인공이 됐다. 해리슨은 40년 넘는 연구 끝에 1759년 ‘크로노미터H4’라는 정교한 해상시계 개발에 성공했고, 마침내 해상 경도 측정 시대가 열렸다.

경도 측정법을 손에 넣은 영국 해군은 바다를 지배하게 됐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를 아는 능력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출발점이었다. 적도를 기준으로 하는 위도와 달리, 경도는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국가들이 수용하는 기준을 통해 만들어진다. 영국이 경도법과 천문 연구를 통해 경도 파악에 쏟은 노력과 기여는 영국 그리니치천문대를 경도값 0, 모든 시계의 기준으로 만들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끝났다. 한국 경제와 학계의 규모, 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 예산 세계 1위인 점 등을 고려할 때 노벨 과학상이 전무한 것은 아이러니다. 한국연구재단이 최근 10년간 노벨상 수상자들을 조사한 결과, 핵심 논문 생산까지 17년, 노벨상 수상까지 또 14년이 걸렸다. 노벨상은 대부분 30년 연구의 결실이었다. 한국의 연구과제 성공률 98%라는 통계는 성공이 보장된 ‘뻔한 연구’만 하는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존 해리슨이 40년간 해상시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처음 개발한 온도변화를 보정하는 이중금속띠나 마찰방지 장치는 현재도 사용되는 기술이다.

구본권 미래팀 선임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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