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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키 154㎝·발 213㎜ '땅콩 검객' 26년, 99% 불리해도 1% 유리함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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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미리 기자의 1미리]

펜싱 선수생활 은퇴한 남현희

"성형했다고 매도당해… 100번째 메달은 선수 인권 운동으로 딸 것"

"발 크기가 정확히 213㎜예요. 제일 작은 펜싱화가 220㎜인데 크게 나와서 휙휙 벗겨져요. 항상 깔창 깔고 양말 두세 켤레 겹쳐 신고 뛰었어요." 그녀가 맨발로 펜싱화를 신어 보였다. 뒤축 쪽으로 손가락 두 개가 쑥 들어갔다. "초기엔 투구도 맞는 게 없었어요. 투구가 커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목 디스크를 달고 살았어요." 태극 무늬로 칠한 투구를 보여줬다.

조선일보

남현희가 26년간 한 몸 같았던 펜싱 투구와 검을 들었다. 투구에 태극 무늬가 칠해져 있다. 국가대표만 20년. “선수로서 제 점수요? 99점.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할 자신이 없어요. 다 쏟아부었습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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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스튜디오에서 펜싱 선수 남현희(38)가 몸집만 한 장비 가방을 풀며 말했다. 이날은 선수로서 공식 훈련을 중단한 날. "자연인이 된 첫날이네요."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남현희는 지난 10일 막 내린 전국체전을 끝으로 26년 검객(劍客) 인생을 마감했다.

한국 여자 펜싱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 플뢰레 개인전 은메달), 한국 펜싱 최초 4회 연속 올림픽 진출, 국제대회 획득 메달 수 99개, 역대 아시안 게임 한국 최다 금메달 보유(6개·박태환과 공동)…. '최초' '최다' 타이틀을 쌓아왔다. 주종목은 머리, 팔, 다리를 제외한 몸통 부분을 찔러 점수를 내는 '플뢰레'. 국가대표로 태극마크 단 햇수만 20년이다.

맞는 장비도 없던 154㎝ '땅콩 검객'의 26년, 운동과 육아를 병행한 '엄마 검객'으로 살아온 7년 세월은 어땠을까. 인생 3분의 2를 보낸 피스트(piste·펜싱 경기장)에서 막 내려온 그녀를 만났다.

1% 확률에도 길은 있다

"'저렇게 작은 선수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작고 연약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의 확률일지라도 방법은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시길요."

지난 4일 전국체전 펜싱 경기가 열린 한양대 올림픽 체육관. 남현희가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팬들 앞에서 열린 조촐한 은퇴식이었다. 처음 검을 잡았을 때 뜀박질 하나는 끝내줬던 '날다람쥐 여중생'은 어느덧 여섯 살배기 딸을 둔 엄마가 됐다.

―펜싱 인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1%의 확률'을 강조했어요.

"펜싱 해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과정이었어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불리한 조건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배운 시간이었어요."

―이를테면요.

"제가 참 작잖아요. 운동선수론 안 좋은 조건이죠. 그런데 사진 찍을 때면 늘 중간에 저를 세워요. 작아서 안 보인다고. 욕심 안 부려도 항상 '센터'예요(웃음). 선수들이 해병대 훈련할 때 단체로 고무보트를 들어요. 제가 다른 선수보다 머리 하나쯤 작으니 보트에 손이 안 닿는 거예요. 조교가 저더러 그냥 앞으로 나와서 끈을 잡으라더군요. 우스개지만, 100% 불리하기만 한 조건은 없단 걸 말하고 싶어요. 99% 불리해도 잘 보면 1% 유리한 구석이 보여요. 그걸 그냥 넘기지 말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선수로서는 그래도 단신이 치명적 단점이었을 텐데요.

"키가 상대방 어깨 정도밖에 안 오니 툭하면 상대 어깨에 얼굴을 부딪혔어요. 그래서 얼굴이 비대칭이에요. 안 부딪히면서 이기려면 속도로 승부 걸 수밖에 없었어요. 발이 안 보일 정도로 스피드를 냈죠. 모두가 '기술 펜싱'을 쳐다볼 때 '발 펜싱'을 한 거죠. 본 척도 안 했던 유럽 선수들이 박진감에 매료됐다면서 응원해줬어요. '1등' 동기 부여를 한 것도 작은 키였어요."

―작은 키가 1등 욕심을 부추겼다고요?

"국제무대에서 동메달로 시작했어요. 작은 키에 단상 맨 아래에 있으니 푹 꺼져 존재감이 없더군요. 개인 남현희뿐만 아니라 한국 펜싱 위상이 덩달아 낮아지는 것 같아 자존심 상했어요. 단상 맨 꼭대기에 올라가야 다른 선수들하고 눈높이가 같아지고 관객이 저를 볼 수 있겠더라고요. 3등으로는 안 끝내겠다, 반드시 1등 하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했어요."

조선일보

남현희가 펜싱 팡트(팔다리를 쭉 뻗어 찌르는 공격 자세) 포즈를 취했다. 지도자로서 2막을 시작하는 지금이 “팡트 직전 단계 같다”고 했다. 마무리 동작에서 확실히 찔러야 득점하듯 지도자로도 최선을 다해 펜싱 인생을 확실히 마무리하겠단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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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꺼풀, 인생을 가르치다

몸집은 작지만 어렸을 때부터 운동 신경이 남달랐다. 육상선수였던 아버지, 배구선수였던 어머니 피를 물려받았다. 중1 체력장 시간, 키 번호 2번이었는데 멀리뛰기에서 반 친구 51명 중 제일 멀리 뛰었다. 눈여겨본 펜싱부 코치가 제일 키 큰 51번 친구와 남현희 두 명을 펜싱부로 데려갔다.

―펜싱 장비가 비싸다고 들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아버지가 30년 넘게 가내수공업으로 장갑 만드는 일을 해 저희 세 자매 뒷바라지를 했어요. 부모님이 장비 사준 적이 두 번 정도밖에 없어요. 그것도 풀 세트는 아니고 필요한 것만. 고등학교 때 집에 압류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기억도 있습니다.”

IMF 외환 위기 여파로 대학(한국체육대) 1학년 때 집안 사정이 최악이었다. 세계청소년대회 출전을 위한 국내 선발전이 열렸다. 출전 자격은 3등까지. 참가비 일부는 자비 부담해야 했다. 8강에 올라 기쁜 마음에 전화했는데 엄마가 말했다. “현희야, 정말 미안한데 이번엔 그냥 포기해 줄 수 없겠니….” 눈물 머금고 4강 진출전에서 일부러 졌다.

작은 체격 때문에 달린 ‘국내용’이란 꼬리표를 뗀 건 남현희 자신이었다. 대학 졸업 후 실업팀(성북구청)에 입단해 계약금 2000만원을 받았다. 1000만원은 부모님 드리고, 나머지 1000만원으로 코치도 없이 국제 대회 4개에 참가해 2004년 아테네올림픽 출전권을 땄다. 이후 2005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여자 플뢰레 단체전 첫 우승을 이끌며 갑자기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달콤함은 한 달도 못 갔다. 그 유명한 ‘성형 파문’이 터졌다. “아직도 찜찜하다. 한번은 제대로 정리하고 싶다”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운동을 정말 격렬하게 하던 때라 눈두덩이 꺼지고, 볼이 푹 팼어요. 거울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대표팀에서 쌍꺼풀 수술을 하는 언니들도 좀 있었고요. 세계선수권을 끝으로 그해 대회 일정이 끝나 경기가 없는 기간이었어요. 국가대표 총감독, 당시 소속팀(서울시청) 코치진에게 성형 수술을 허락받고 외박 나가는 주말에 쌍꺼풀 수술, 볼에 지방 주입하는 수술을 했어요. 의사는 간단한 수술이라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부었어요. 대한펜싱협회 게시판에 원색적인 욕설 담긴 게시물이 올라왔습니다. 일이 커지자 수술을 허락했던 지도자가 기자회견을 열어 자긴 몰랐다고 발뺌했어요.”

얼마 후 협회 관계자가 와서 말했다. “남현희 당장 (선수촌에서) 퇴촌해!” 훈련 기간 중 무단으로 성형 수술을 했다는 이유였다. 선수 자격 2년 정지 중징계가 내려졌다가 미리 보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6개월 정지로 줄었다. 시합하며 상대가 찌른 칼보다 주변 사람이 마음에 찌른 칼이 더 아팠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겠어요?

“네. 중요한 건, 훈련 외 시간은 자유 시간이고 성형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펜싱 관계자가 저를 죄인 취급하면서 사탕 문 것처럼 부어 있는 모습을 정면·좌우 다 찍어 갔습니다. 인권은 없었습니다. 지도자들 알력 다툼에 제가 이용된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은퇴 후 선수들 인권을 위해 애쓸 겁니다.”

그는 “정말 슬펐던 건 선수 자격이 정지됐다는 게 아니었다”고 했다. “비인기 종목이라 설움, 괄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누군가 펜싱을 인기 종목으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그게 나였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국 펜싱에 먹칠했단 생각에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쌍꺼풀 사건’ 후 성적이 올랐어요.

“당시엔 국내에서 선수 자격이 정지돼도 국제 대회에 나갈 수 있었어요. 개인 자격으로 출전한 국제 경기에서 잇따라 우승했어요. 17~24등 사이를 오가던 세계 랭킹이 4위권 안으로 급등했어요.” 펜싱 때문에 상처받았지만 다시 일으킨 것도 펜싱이었다.

조선일보

2008년 베이징올림픽 플뢰레 개인전에서 한국 여자 펜싱 최초로 은메달을 땄을 때. /조선일보 DB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웠겠습니다.

“한 살이라도 저보다 오래 산 사람들 말을 새겨들으려 해요. 검색창에 습관적으로 ‘힘이 되는 명언’을 넣어봅니다. 아는 동생이 보내준 김구 선생님 말씀도 좋아합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선수 이력에서 처음 걷는 길이 많아 막막함 느낄 때마다 곱씹었습니다.” 최근 인스타그램엔 이런 말을 올렸다. “네가 훌륭한 건 넘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넘어졌을 때 벌떡 일어나기 때문이다. 중심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승리만 있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발렌티나 바첼리(이탈리아)와의 경기를 봐도 그렇고요(2008년 베이징올림픽 결승에서 만나 한 점 차이로 아깝게 졌고, 2012년 런던올림픽 3, 4위전에서 만나 또 패했다).

“런던올림픽 때 지고 나서 대기실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펑펑 울었어요. 열악한 한국 펜싱 환경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서럽더라고요. 그때 누가 등을 꼭 껴안아 주며 말했어요. ‘내가 네 맘 다 알아.’ 바첼리였습니다. 승자의 품격이었어요.”

또 다른 이름, 하이 엄마

―작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때 은퇴 선언을 했는데 다시 복귀했지요?

“관둔다고 했는데 2024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에 도전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선수로서 영예로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자격이 직전 올림픽 참가자라야 합니다. 내년 도쿄올림픽에 출전해야 출마할 수 있단 얘기였죠.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멈췄나요.

“도저히 몸이 안 따라줬습니다. 그사이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신세였습니다. 작년에 무릎 연골 제거 수술을 했어요. 운동 때문에 엉덩이뼈는 비정상적으로 자라 남들보다 2.5배 커졌어요. 아파도 도핑에 걸릴까 봐 약도 웬만하면 안 먹었어요. 온몸에 염증을 달고 삽니다. 살기 위해 더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조심스럽게 “맘도 아팠다”고 했다. “한국 스포츠 시스템이 나이 먹고 운동하려면 이상하게 눈치봐야 하는 구조입니다. 종목 불문하고 베테랑 선수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관리 시스템은 없으면서, 결정적인 순간 한방 해주기 바랍니다. 지치지요.”

―국제대회 메달이 딱 99개예요. 아쉽진 않습니까.

“은퇴식에서 100번째 메달은 어려운 환경에 있는 후배들, 특히 여자 선수들 인권 위한 봉사로 대신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메달은 저희 딸이 따줬으면 해요(웃음).” 딸이 3~4개월 전 펜싱을 시작했는데 곧잘 따라온다며 딸 바보 미소를 짓는다.

2013년 아이를 낳고 7년간 ‘워킹맘’으로 살았다. 한국 펜싱 국가대표 선수 최초의 ‘엄마 검객’. “체격이 왜소한 데다 펜싱이 한쪽으로 하는 운동이다 보니 골반이 많이 틀어져 있어요. 임신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런던올림픽 끝나고 기적적으로 임신했지요.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아이 이름을 ‘하이(hi·안녕)’라 지었어요.”

―출산 후 2개월 만에 복귀했더군요.

“소속팀(성남시청)에서 빨리 복귀하기를 원했습니다. 친정엄마도 실력이 아깝다며 애 봐줄 테니 하라고 하셨어요.”

―운동과 육아, 병행하기가 어땠습니까.

“국가대표로 선발돼 젖먹이를 떼놓고 선수촌에 들어가야 했어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훈련 끝나고 몰래 저녁에 나온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딸과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자, 딸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자,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남현희는 “선수로서는 99점, 엄마로서는 50점, 아내로서는 빵점”이라고 했다. “남편(사이클 선수 공효석·33)이 같은 운동선수라 다 이해해주겠지 하면서 너무 신경을 못 썼어요.”

―운동선수들이 은퇴 무렵 막막하다고 하던데요.

“작년에 은퇴하겠다고 맘먹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아이 유치원 보내고 카페에 앉아 4시간씩 영어 책 펴놓고 씨름했는데 하나도 머리에 안 들어왔어요. 공부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거예요. 그제야 카페에 앉아 공부하는 어린 친구들이 보였어요. 나는 왜 저 나이에 공부하는 기쁨을 못 느꼈을까, 후회가 됐습니다.”

―은퇴 후 계획은 뭔가요.

“지도자 길을 걸으려 합니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인성 교육을 같이 하고 싶어요. 이달 말부터 유승민 IOC 선수위원이 만든 은퇴 선수·유소년 스포츠 지원 단체 ‘두드림 스포츠’에서 부회장을 맡아 사회 공헌도 하려고요.”

―지도자가 돼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은 교훈이 있다면요.

“남의 성공을 시기하지 말자. 누구에게나 성공의 순간은 옵니다. 타인과 나의 성공 시점이 다를 뿐입니다. 1위는 늘 한 명뿐이니까요. 최선을 다하면서 나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펜싱에 빗대면 어느 지점에 와 있는 걸까. “팡트(fente·팔다리를 쭉 뻗어 찌르는 공격 자세) 직전 같다”고 했다. 마지막 일격(一擊) 일보(一步) 직전. 그전의 현란한 발놀림은 거들 뿐, 승패는 마지막 한 방에 달렸다. 펜싱 인생의 마무리 팡트로 지도자를 택한 남현희. 알레(allez·시작)! 2막 시작 구령이 울렸다. 남은 건 혼신의 팡트.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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