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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세상읽기]설리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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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에프엑스’의 전 멤버 설리가 지난 14일 안타깝게도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내게는 그의 극단적 선택이 같은 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임 발표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의 차이는 단지 직책과 생명의 차이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 일상, 젠더의 차이였다. 어린 나이에 수년 동안 지독한 남성 악플에 시달려야 했던 가련한 삶. 데뷔 때부터 ‘에프엑스’의 음악을 좋아했고, 그의 당당함을 응원했다. 오랫동안 누리꾼의 악플에 시달려 극심한 우울증을 앓은 그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여성 뮤지션으로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당당하게 살고 싶은 것이 왜 비난을 받아야 할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보다 더한 시련이 있을까? 그는 그렇게 죽었다. 아니 가수이자 배우로서 ‘연예계’라는 잔인한 도시에서 더 이상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스스로 생을 멈추었다.

그의 사망 전날 보았던 영화 <조커>의 배경인 고담시와 주인공 아서 플렉이 자꾸 떠오른다. 비정한 고담시의 외로운 무명 코미디 배우 아서 플렉이 내뱉은 대사들은 마치 설리의 내면의 독백과도 같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정신질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해야 하는 것이야.” “난 살면서 단 1초라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내 죽음이 내 삶보다 가치 있기를.”

아서 플렉의 대사를 설리에게 대입해보았다. 미쳐 돌아가는 고담시처럼 극한경쟁, 감정노동, 극단적 악플에 시달리는 한국 연예계는 비극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마음의 아픔을 고백하기는커녕 오히려 관객을 향해 미소를 지어야 하는 위선의 시간들, 유명하지만 나는 과연 행복한가를 수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잔인한 아이돌시장,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여성 아이돌들의 내면의 아픔들, 악플에 시달리면서 삶보다 죽음을 가치 있게 선택한 ‘절망적인 소망’이란 역설. 설리의 황망한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이돌 스타가 되려면, 감정노동과 악플은 평소의 감기처럼 달고 다녀야 한다는 아이돌의 숙명은 특히 여성으로서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이다.

아이돌이기 이전에 여성주체로서 당당해지기를 원했던 설리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악플은 마음의 심장을 찌르는 백정의 칼날이 되어 그에게 향한다. 아마도 그러한 악플과 공생하는 선정적인 연예 저널리즘이 문제의 발단일지도 모른다. 악의적인 기사는 악플을 낳고, 악플은 다시 악의적인 기사를 재생산한다. 그리고 그의 연예활동을 오랫동안 지원했던 소속사 역시 근원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경향신문

그는 열일곱 살에 데뷔할 당시 ‘에프엑스’의 막내였다. 연습생 시절부터 과도한 경쟁에 시달려왔던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들, 그것들을 해소할 수 있는 휴식과 대화가 충분했는지 묻고 싶다. 그 어느 당사자들보다 소속사 식구들이 가장 마음 아프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떠나는 일이 없도록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설리의 죽음을 개인의 극단적인 선택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의 죽음은 그와 동시대를 함께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지난 화요일 밤, 문화방송 <PD수첩>에서 모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의 조작과 부정행위의 의혹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매우 충격적이고, 허탈하다.

모든 오디션은 각본에 불과하고 팬들의 투표 역시 부질없이 조작된 것이다. 그렇게 부정하게 선발된 멤버들은 그 방송사의 소속사로 묶여서 오랜 기간 동안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하다가 사라진다. 설리의 죽음의 한 징후를 보는 것 같다.

우정과 배려가 없는 잔인한 사람, 잔인한 시스템, 잔인한 자본, 잔인한 세상. 이 잔혹한 세상을 떠난 설리에게 말하고 싶다. 죽음이 삶보다 더 값질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는 부디 행복하기만 바랄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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